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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에스페란사, 희망을 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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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에스페란사, 희망을 낳다

입력
2010.10.15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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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알던 그 나라는 북쪽엔 사막이 있고 남쪽엔 빙하가 있는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였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그 나라는 과일가게에 진열된 싱싱한 청포도와 가격 대비 훌륭한 품질을 가진 와인이 생산되는 나라였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그 나라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가수 비올레타 파라, 세계 최초로 민주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를 구성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나라로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감동적 휴먼 드라마의 주제

그토록 멀고도 낯설던 나라가 일순 새로워졌다. 이제 그 나라, 칠레를 이야기할 때면 지하 700m 막장에서 두 달이 넘게 사투를 벌이다 구조된 33인의 광부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상에 올라오자마자 외쳤던 "비바 칠레!"와, 몰려든 취재진을 향해 "나는 광부다. 나를 유명인처럼 대하지 말라"고 일갈한 의연한 생존자와, 어쩌면 당사자보다 더 가슴을 태웠을 가족이 밝힌 "많이 배웠다. 앞으로 더 사랑하고 이해하게 될 것 같다"는 평범하여 더욱 인상적인 소회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민의 생명을 1순위에 놓는 정부와, 신체의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까지 세심하게 고려한 체계적인 구출 작업은 놀라움을 넘어 눈물겹게 부럽기까지 하였다. 바야흐로 칠레는 내게, 전 세계인에게 이전과 다른 의미로 새롭게 다가오게 된 것이다.

발 빠른 감독들이 벌써부터 영화로 만들 채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지만, 33인의 광부들이 지하 구리광산 대피소에서 보낸 69일은 휴먼 드라마의 정교한 대본처럼 하나하나가 경이롭고 감동적이다. 그 드라마의 주제는 두말 할 필요 없이 선명하다. 그것은 희망, 때로 막연하고 진부한 캠페인 단어처럼 느껴지던 지극히 고전적인 인간의 덕목이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기와 물과 음식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오묘한 존재는 물질적인 조건만으로 생존하지 못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에 의해 죽음의 수용소에 갇혔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에서 1945년 새해까지 1주일 동안 수용소의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성탄절까지는 다시 집에 돌아갈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던 수용자들이 성탄절이 지나 희망을 상실하게 되면서 갑자기 기력을 잃고 쓰러져버렸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학 연구 결과가 인간의 심리적 상태와 육신의 면역 상태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증명하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생각이 실제로 인간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영혼을 마비시키는 독극물과 같다. 처음 광산이 붕괴되어 지하에 갇혔을 때, 광부들 중에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17일이나 지상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절망으로 체념해버리고 싶었던 순간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아무리 외부와 화상회의를 하고 비디오게임을 즐기고 축구경기까지 보는 '럭셔리'한 생존투쟁이었다고 해도 폐쇄된 곳에 갇힌 채 보내는 69일은 미치거나 병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두려움의 유일한 치료제

하지만 그들에게는 두려움에 감염된 인간을 치료하는 유일한 해독제, 희망이 있었다. "한정된 실망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무한한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은 광부들의 굳센 삶의 의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일하고 운동하고 기도하며 한 순간 한 순간을 남김없이 살았다. 자신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고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기에 기어이 살아남았다.

광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광산 입구에 설치된 캠프의 이름이 에스페란사(Esperanza), 아버지가 지하에 갇힌 사이 세상의 빛을 본 딸의 이름도 에스페란사, 희망이라는 뜻의 이 스페인어는 칠레가 낳은 시월의 기적으로 오래도록 세계인들의 입에 회자될 것이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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