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주교로 일제 말기부터 1960년대까지 서울교구를 책임졌던 노기남(1902~1984ㆍ사진) 대주교는 해방 전후 시대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얼굴이지만, 친일 행적과 해방 후 정권과의 밀착 등으로 ‘정치주교’ 논란도 적지 않은 인물이다. 김수환 추기경 이전 시대 한국 천주교의 대부였던 그는 1962년 서울교구가 대교구가 되면서 대주교에 올랐으며 1967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났다. 지난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시켜 천주교계가 반발하기도 했으나, 교계로선 그를 공론화하기 부담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계 교회사 전문연구기관인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5일 서울 명동 주교좌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천주교회’란 주제로 노 대주교의 행적을 평가하는 심포지엄을 열어 주목된다. 교계 내부에서 노 대주교를 학술적으로 조명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장인 김성태 신부는 “노 대주교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면 교회 공격의 빌미를 주게 될 것이란 염려의 말도 들었다”며 “하지만 그 분의 활동이 지닌 교회사적 의미를 평가하는 것은 그 분의 행적을 친일과 구별해 바로 보는 데 근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심포지엄에서는 크게 노 대주교를 일제 시대와 해방 후 행적으로 나눠 살펴보는데, 발제자들은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당시 천주교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입장을 취한 반면, 해방 후 정권과 밀착한 반공 활동에 대해서는 “교회를 정부의 활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곳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1942년 프랑스인 라리보 주교의 뒤를 이어 한국인 최초로 서울교구장(주교직)에 오른 그는 일제 전시동원체제에서 황국신민화를 보급하고 전쟁 출병을 독려하며 국방헌금을 모으기도 했다. 이장우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은 미리 배포한 발제문에서 “당시 천주교회가 처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일제의 의도와 달리 일본인 대신 그가 서울교구장이 되자, 총독부는 신학교 폐쇄 조치 등으로 교회를 위협했으며 심지어 고해성사까지 입회해 감시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굴욕적인 타협’이었다는 얘기다.
반면 김수자 이화여대 교수는 해방 후 노 주교가 이승만과 밀착해 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반공단체를 결성해 적극적인 반공 활동에 나선 것에 대해 “당시 천주교회는 종교단체이자 강력한 반공단체의 하나였다”며 “이로 이해 종교단체의 중립적이고 초월적 태도가 약화되고 시류에 휩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그는 “종교 지도자로서 공산정권에 우호적 입장을 취하기 쉽지 않았겠지만, 공산주의와 북한을 무조건 박멸할 존재로 설정해 한반도 이념 대립을 공고화하고 고착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한윤식 신부, 노용필 한국사학연구소 소장, 이현진 국민대 교수, 허동현 경희대 교수가 종합토론을 벌인다. 한국교회사연구소 관계자는 “노 대주교는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분이지만 그동안 연구가 거의 없었다”며 “이번 심포지엄은 그 분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연구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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