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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황장엽씨가 남기고 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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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 황장엽씨가 남기고 간 것

입력
2010.10.1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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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선생은 떠났으나 족적은 크게 남아 있다. 한국에 와 북한 민주화운동의 씨를 뿌렸고, 북한에 남기고 온 인간 중심의 주체사상은 북한체제 변화의 새싹으로 돋아나고 있다. 원래 주체사상은 소련파를 사대주의자, 주체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하고 숙청하기 위해 김일성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당시에 주체는 곧 반소련의 의미였다. 1970년대 초에 황씨가 정립한 주체사상은 1950~60년대의 자주노선의 주체사상과는 크게 다르다.

인간 중심의 주체철학 정립

황장엽 판 주체사상은 '인간중심의 주체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상으로,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파격적인 사상이다. 그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를 주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 놀라운 일은 그것이 북한에서 통치이념으로 수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스탈린 사망 후 흐루시초프의 우상숭배 비판이 북한에서도 김일성 우상숭배 비판으로 이어지자 반소 노선을 택했던 김일성은 소련제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폐기를 원했고 대안을 찾고 있었다. 그때 황장엽이 주체사상에 대한 새로운 사상체계를 내놓자 깊이 검토해 보지도 않고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채택했다.

또 하나는 황장엽 판 주체사상이 대중동원 운동인 천리마운동을 이론적으로 지지하는 사상이었다는 점이다. 황장엽은 이 운동의 군중노선과 주체사상을 결합하여 '군중이 곧 주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핵심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1958년 농업 및 산업 국유화 이후 노동의욕 상실, 책임감 없는 수동적 무사안일,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 그의 주체사상은 주인의식을 강조하는 노동동원 개념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황장엽의 '사람 중심 주체사상'은 김정일의 새로운 주체사상 연구팀에 의해 '수령 중심의 주체사상'으로 변형되었고, 황장엽은 남한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상은 서구의 인본주의 사상과 유사하기 때문에 전체주의 북한 체제에서는 본질적으로 역기능적이고 반체제적이기도 하다.

북한주민들은 처음엔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사상의 원리야 맞지만 현실과는 정반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배급제가 붕괴되고 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암시장경제로 이행된 현 시점에서는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상이 현실과 너무나 맞는다고 인식한다고 한다. 주체사상이 개인주의적 시장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주민들은 주체사상을 내가 벌어서 내가 먹고 산다는 사상, 오직 자기 밖에 믿을 것이 없다는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북 체제 변혁에 기여할 것

황씨의 남한 행과 주민들의 주체사상에 대한 일탈적 이해 때문에 북한은 이듬해 강성대국과 선군사상이라는 새로운 통치이념을 내놓았다. 강성대국과 선군사상이 본격 제기된 1998년 말부터 주체사상은 거의 자취를 감추다가 제2차 북핵문제가 터진 2002년 가을부터 '반미주의, 반제국주의'의 개념으로 다시 부분적으로 사용되고는 있으나, 주체사상은 이제 북한 통치이데올로기의 본류는 아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통치이념으로서 주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으면서 북한 당국이 의도하지 않는 방향의 체제변혁적 기능을 하고 있다. 황씨가 뿌린 씨앗이 싹트고 자라 열매 맺을 날이 멀지 않았다.

서재진 통일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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