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게 잤다. 잠에서 깨고서야 집이 아닌 것을 알았다. 내 잠자리에서도 자다가 눈이 떠지는데, 꿈도 없이 잤다. 눈 감았다 뜨는 사이 후드득 후드득 소리 내며 내리던 가을비는 말끔히 그쳤다. 창 밖으로 맑고 푸른 새벽이 찾아와 내 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빗속의 문학행사가 끝나고 취하고 젖어서 이곳으로 찾아올 때는 이미 하늘도 땅도 깜깜해져버려 한 점 불빛만 보였다. 잠이 든 학생들을 헤아려보니 한 명이 빈다. 한 학생을 깨워 물어보니 승용차 안에서 잔다고 한다. 코를 골 것 같아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 스스로 나갔다고 한다. 피식 웃음이 난다.
외손녀가 상을 받는다고 행사장에 오신 스승과 악양 막걸리를 꽤 많이 마셨다. 취기가 도도했으니 코는 내가 더 심하게 골았을 것이다. 문을 열고 나가니 자연이 무량으로 빚어내는 새벽 공기에 가슴 속까지 상쾌해진다. 날씨 또한 청명하여 앞산인 구제봉이 손을 내밀면 잡힐 듯 가깝다. 골골이 피어난 안개가 구름을 만든다.
그 구름들이 구제봉 허리쯤에 비단처럼 걸려 있다. 벼들이 황금빛으로 익어 평화로운 무딤이들판. 길게 흘러 섬진강을 찾아가는 부지런한 개울. 오랜만에 제 색깔 제 향기로 맞이한,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의 가을 아침 앞에 황홀하다. 한 몇 년 이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입석리란다. 서서히 동쪽이 붉어지고 있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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