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가슴에는 여전히 시와 혁명이 담겨 있었다. 국내 대신 해외를, 혁명 대신 평화를, 펜 대신 카메라를 든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시인 혁명가’라는 소명의식을 가슴 깊이 쟁여두고 있는 듯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올해 초 사진전으로 대중 앞에 섰던 박노해(53) 시인이 신작 시집 (느린걸음 발행)을 들고 찾아왔다. 1999년 이후 12년 만의 시집이고, 1984년 이후로는 네 번째 시집이다. 1998년 7년여의 감옥 생활을 끝내고 나온 뒤, 주로 해외 분쟁지역에서 평화운동에 전념하며 대중의 시야 밖으로 나갔던 그는 그 기간 거의 매일 시를 썼다고 한다. 그렇게 쌓인 시가 무려 5,000여 편. 이번 시집에 실린 시는 그 중 302편을 추린 것인데, 560쪽에 달하는 시집에는 그 10여년의 세월이 녹아있다.
13일 서울 신문로의 NGO단체 나눔문화 사무실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박씨는 “‘실패한 혁명가’로서 책임을 져야 했고, 유명해진 이름이 스스로 잊혀지기 바라면서 긴 침묵 정진의 시간을 보냈다”며 “그 힘겨운 시간, 시가 없었다면 미치거나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지구 멸종동물 1호가 뭔지 아십니까. 시인입니다. 여러분은 야생 그대로의 천연기념물을 보고 있습니다”라며 농담 섞인 웃음으로 간담회를 시작한 그는, 그러나 ‘넌 나처럼 살지 마라’ 등 3편의 시를 비장하게 낭독하면서는 감정이 복받치는 듯 목이 메기도 했다.
그의 비장함은 이제 급박한 계급투쟁이나 사회주의혁명 투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전쟁터와 기아, 분쟁의 현장을 샅샅이 누비면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대해 근원적 물음을 던지며 대안적 삶과 혁명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새 시집은 ‘지구촌의 모순과 고난에 뛰어든 한 무력한 시인의 희망 찾기’, 그러니까 ‘글로벌 시대의 노동의 새벽’이다.
예컨대 시 ‘아이폰 뒷면’에서는 아이폰의 반도체와 모니터를 만드는 제3세계 노동자들의 고난을 읽고, 이라크전쟁 고아를 다룬 시 ‘마루완의 꿈’에서는 ‘전쟁 다음 전쟁인데 언제쯤 끝나겠냐고/ 내가 어른 되기 전에 정말 학교 갈 수 있겠냐고/ 테러리스트 같은 눈동자로 물어오는 것이었다’며 전쟁의 비극에 아파한다. 그에 따르면 이 모순 가득한 시대에 여전히 필요한 것은 ‘탈주와 저항’이며 ‘축적이 아니라 혁명’이다.
그는 20~30대 젊은이들과 토론하며 시집에 실을 시를 골랐다고 했다. 그가 바라는 시집의 주 독자층도 젊은이다. 그는 “젊은이들이 영혼의 테러를 당해 하루 하루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다”며 “(이번 시집은) 젊은이들이 어떤 경우에라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한 시인의 간절한 기도이자 저항과 절규의 목소리”라고 말했다.
박씨가 2001년 창립한 나눔문화는 지구촌의 빈곤, 분쟁 지역 주민을 돕고 평화운동을 펼치는 NGO 단체로 회원 2,000여명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재벌 기부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그가 세운 원칙이다. 새 시대에 그가 추구하는 사회운동의 목표는 ‘삶의 총체적 변화’다. “대지에 뿌리 박고 자급자족하며 삶의 자율성을 높여가는” 대안적 삶이다. 그는 집에 TV도 전화도 컴퓨터도 없다고 한다. 그는 “2014년 출간을 목표로 삶의 총체적 진보 이념을 담은 책을 집필 중”이라며 “시집에 이어 이 책까지 내면 실패한 혁명가로서 내가 진 빚을 다 갚고, 한 매듭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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