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출판산업의 격변기입니다. 앞으로 10년 안에 웬만한 책은 전자책으로 바뀔 것입니다. 세계출판협회(IPA) 회장으로서 전자책 시대 출판의 자유와 지적재산권 보호에 힘쓸 것입니다.”
지난 7일(현지시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기간에 열린 2010 IPA 총회에서 신임 회장으로 선출된 지영석(49) 엘스비어(Elsevier) 부회장의 말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IPA는 출판인의 권리 보호, 출판ㆍ표현의 자유, 저작권 보호 등을 위해 1896년 설립된 국제기구로, 현재 57개국의 대표적 출판단체 70여 곳이 회원이다. 아시아인이 IPA 회장이 된 것은 처음이다.
지씨는 의학, 과학, 공학 분야 세계 최대의 출판그룹인 엘스비어의 부회장 겸 과학ㆍ기술 부문 CEO다. 엘스비어는 ‘랜싯(Lancet)’ ‘셀(Cell)’ 등 약 2,000종의 저널과 전문서적을 내고, 의과학 논문 데이터베이스 ‘사이언스 다이렉트’와 ‘스코퍼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카이스트가 11일 서울에서 주최한 세계 연구중심대학 총장 포럼 참석차 방한한 그를 만났다.
전자책이 대세가 된다고 전망하는 근거로 그는 출판환경과 세대의 변화를 꼽았다. “전자출판에 필요한 콘텐츠, 기기, 서비스가 이제 하나로 뭉쳤습니다. 남은 건 적용뿐이지요. 종이책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전자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인구가 앞으로 10년 안에 종이책 세대보다 더 많아집니다.”
그는 전자책 시대의 관건은 기술이 아니라 콘텐츠라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의 전자책 육성 방안이 단말기와 솔루션 등 기술 분야에 치중하는 것과는 반대다. “핵심은 콘텐츠입니다. 콘텐츠가 좋아야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따라서 콘텐츠 품질 관리자로서 출판사의 역할은 갈수록 중요해질 겁니다.”
그는 전자책에 뛰어들 것이냐 말 것이냐를 고민할 단계는 지났다고 단언했다. “뛰어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출판사들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느냐고 질문할 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자책은 종이책이 구현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매체다, 얼마나 멋진 기회냐.’ 문제는 전자책에 뛰어들려면 초기 자본 투자가 필요한데, 그럴 힘이 있느냐입니다. 한국 출판사들은 너무 영세해서 과감한 투자나 모험을 하기 어렵죠. 한국 최대 출판사의 국내 시장점유율이 5%도 안되는 걸로 압니다. 국제적으로 시장이 전면 개방된 전자책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려면 인수합병 등으로 규모를 키우고, 작은 출판사들은 공동투자 등으로 힘을 합쳐야 합니다.”
지씨는 지성구 전 세네갈, 핀란드 주재 대사의 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났다. 고1 때 다시 미국으로 가서 대학원을 마친 뒤 8년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서 일하다 1992년 세계 최대의 출판그룹인 잉그램으로 옮겼다. 1997년 잉그램의 자회사인 라이트닝 소스를 설립해 세계 최초의 주문형 출판(POD)을 선보였고, 랜덤하우스 아시아 초대 회장을 거쳐 엘스비어로 옮겼다. 5년 전 미국 국적을 취득, 이번 IPA 총회에 미국 대표로 출마해 당선됐다. 임기는 내년 1월부터 2년이다.
암스테르담, 런던, 뉴욕 세 곳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지씨는 1년에 백수십 차례 이상 비행기를 탄다. 프랑크푸르트 IPA 총회를 마치자마자 홍콩에 갔다가 서울에 온 그는, 다시 암스테르담, 런던을 들러 16일 뉴욕으로 가야 한다며 12일 출국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