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소매가 까매질 때까지 살았다 보증금도 없이 우리는 내려앉아 서로의 끝을 생각하느라 분주했다 잠에 가닿을 때까지 입술을 깨물던 당신의 귀에 광부들은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일이 그날들의 전부였다 소리가 물고 오는 소리는 갱 입구의 카나리아 소리를 닮았다가, 무너지는 갱도에서 새나오던 가스 소리를 닮았다가, 혼들의 울음을 닮아갔다
손이 찬 당신이 물컵을 내려놓았다 번진 입술이 새가 날아오르기 전 땅을 깊게 디딘 발자국 같았다면 살아남은 말들은 쉽게 날 줄을 알았다 가난하다고 말해왔다 또 아픈 나의 이(齒)를 만져오면서 내가 한 번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을 맞추어보겠다고 말해왔다 가만히 먼 곳을 쳐다보는 일이 술을 깨는 데에 그만이라고 말해왔다 다시 가난하고 심심하다고 말해왔다 나는 그 말들에 연을 묶어 훠이훠이 당기며 살았다
사실 우리 아름다움의 끝은 거기쯤 있었다 나는 당신과 잠시 만난 공중(空中)을 내 눈에 단단히 넣어두고도 계속 허한 눈빛을 지으려는 것이었으니, 버스를 타고 나간 사람을 정류장에서 기다리듯 하늘로 나간 당신의 말들은 하늘을 보며 기다려야 했으니, 그러니까 소매든 옷깃이든 눈빛이든 여기보다 새카맣게.
● 칠레의 땅속에 있는 광부들의 모습을 TV로 본 일이 있습니다. 희망이라는 게 얼마나 구체적인 감정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눈빛들이더군요. 보다 보니 어린 시절이면 심심찮게 매몰사고가 일어났다는 속보가 나오던 흑백텔레비전이 생각났습니다. 광부들은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는 건 광부들에게 전해오는 여러 가지 금기사항 중 하나입니다. 금기사항이 많다면 그 일은 너무나 아슬아슬한 일이라는 뜻이겠죠. 도시락의 밥을 4주걱 푸지 않는다, 부부싸움 후에는 가급적 갱에 들어가지 않는다 등등. 어려울 때, 힘들 때, 나약해졌을 때, 우리는 그런 금기사항들에 매달립니다. 언제 갱이 무너질지 모르니까 그건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때 우리는 희망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힘들겠지만, 힘들다고 해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닐 테니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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