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반도는 통일 전 동ㆍ서독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분단의 골이 깊습니다. 통일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상호 교류를 서둘러야 합니다."
20년 전, 동독 총리로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봤던 노(老)정객은 남북이 처한 현실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스 모드로프(82) 전 동독 총리. 그는 1989년 11월 시민혁명에 의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 동독 정부 수반이었다. 통독 20주년을 맞아 4일 베를린 시내에서 만난 모드로프 전 총리는 "독일은 냉전 체제가 엄존한 상황에서도 양쪽 주민이 왕래를 지속해 통일의 물꼬를 열었다"며 "남북한도 시민사회 교류에 보다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미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한국의 통일 정책과 한반도 정세, 북한 내부 상황 등을 소상히 꿰뚫고 있었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우선 남북관계가 정체를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로 대북 정책의 일관성 부재를 꼽았다.
"한국의 이전 정부는 '햇볕정책'을 통해 북한에 많은 지원을 했지만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했어요. 이런 식으로는 남북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80년대 동ㆍ서독의 경우 공산 체제인 동독에서 서독을 방문한 주민이 150만 명에 달하는 등 여행 자유화가 유지된 덕에 상대에 대한 이질감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82년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정권을 잡았을 때만 해도 통일 문제는 큰 이슈가 아니었다"며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 변화를 이루자'는 시민사회의 꾸준한 시도가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4개국은 한반도 통일을 놓고 각자 다른 셈법을 취하고 있다"며 통일 과정에서 남북한의 노력 못지 않게 4개국 대립관계를 최소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모드로프 전 총리는 "군부가 김정은 체제를 받아들일지 의심스럽다"는 말로 북한의 권력 승계 작업에 회의적 입장을 나타냈다. "북한은 지금 모든 투자가 군을 통해 이뤄질 정도로 군부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김정일과 달리 갑자기 등장한 김정은이 순조롭게 권력을 잡을지 주목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모드로프 전 총리는 고 김일성 주석과의 일화 한 토막을 들려줬다. "1986년 김일성은 동독 드레스덴 지역을 여행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수행단을 데려왔어요. 당시 동독 정치가들 사이에선 '쿠데타로 북에 홀로 남겨진 김정일이 위험에 처할까 봐 반대파를 모두 끌고 왔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지요."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김일성도 권력 세습만큼은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베를린=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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