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할아버지 댁 뒤란에 키 작은 늙은 밤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밤나무는 밤이 익는 철보다 일찍 여문 '올밤'을 선물해주었다. 제일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시던 할머니는 그 올밤들을 주워 깨끗이 씻어 밥을 하는 가마솥에 넣어 쪄주셨다. 할머니는 삶은 올밤들을 감춰두었다가 고모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초가을 햇볕이 좋은 툇마루에 앉아 손자인 내게 손수 까주셨다.
주전부리가 귀하던 시절, 할머니의 올밤은 고소하고 달콤한 최상의 맛이었다. 뒷산엔 할아버지가 심은 밤나무 열댓 그루가 있었다. 장대를 들고 밤을 털던 기억이 생생하다. 장대로 밤나무 가지를 치면 크고 작은 밤이 후드득 후드득 소나기처럼 떨어지곤 했다.
밤송이도 함께 떨어져 그 속의 밤을 꺼내느라 밤 가시에 수없이 찔렸고 밤에는 호롱불 곁에서 눈물 찔끔거리며 손에 박힌 가시들을 뽑곤 했다. 스승의 사모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선생님께서 산행에서 시인 제자 주려고 밤을 주워오셨다고 가져가라는 전화였다. 찾아뵈니 손톱처럼 작은 예쁜 '손톱밤'이었다.
손톱밤 스무 개쯤 모아야 요즘 개량된 큰 밤 하나 정도 될까 싶었다. 사모님이 슬쩍 흘리시는 말이, 양이 적어 선생님께서 아침 일찍 택시 타고 한 번 더 다녀왔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환한 얼굴에 할머니 얼굴이 겹쳤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새삼 알았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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