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카를로스 사우라(78)가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첫 방문했다. 사우라는 사진작가로 시작해 1960년 영화계에 입문한 뒤 50년 넘게 스페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명망을 얻었다. 베를린국제영화제 대상인 황금곰상(‘질주’)을 받았고, 감독상인 은곰상(‘사냥’ ‘얼음에 박힌 박하’)도 두 차례 수상했다.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까마귀 기르기’) 기술대상(‘탱고’) 등도 받은 이 대가를 11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한 호텔에서 만났다. 부산영화제 특별프로그램 ‘전복의 상상, 상상의 전복: 프랑코정권기 스페인 걸작전’에서 그의 영화 ‘까마귀 기르기’와 ‘부랑자들’, ‘사냥’이 상영 중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최신형 디지털카메라를 메고 나타난 그는 “이제 나는 당신의 노예다. 마음껏 질문해달라”며 말문을 열었다. 올해 부산영화제의 가장 귀한 손님으로 평가 받는 그는 14일 국내 개봉하는 ‘돈 조반니’를 만드는 등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좋아하는 글쓰기와 미술, 음악, 사진 등을 꾸준히 즐기는 게 비결인 듯하다”고 말했다. “첫 방한을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한국은 건강이 허락한다면 다시 오고 싶은 나라”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사우라는 엄혹했던 프랑코 독재정권 시절을 관통하며 수작들을 만들었다. 20대 초반 프랑코 정권에 저항적인 영화를 만들자는 선언에도 참가했다. 그는 “정당 활동까진 하지 않아 프랑코 정권의 박해를 받지 않았지만 데뷔작 ‘부랑자들’이 15분이나 잘려나가 과연 내가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영화 두 편 때문에 (우익으로부터) 테러 위협을 받기도 했다”는 그는 “스페인을 떠나는 게 (영화를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떠날 수 없었다”고 젊은 시절을 회고했다. “영화 한 편 한 편을 만드는 것이 모험이었습니다.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매번 불안해 했는데 칸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가 저에게 많은 힘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억압적 시대상이 제 작품에 도움을 주었다고 단언할 수 없네요. 매를 많이 맞는다고 모든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라진 않잖아요.”
그는 최근 들어 남미의 춤인 탱고나 플라멩코 등 다른 예술 장르를 스크린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는 “난 춤에 대한 영화를 찍으면 춤 자체를 찍으려 한다. 그래야 예술가의 재능을 100% 담아낼 수 있고 동양적 여백의 미를 보여줄 수 있다”고 밝혔다.
“일곱 살 때 첫 사랑의 모습을 찍으며 사진에 빠져들었다” 그는 “카메라 600대를 갖고 있는데 매일 운동하듯 사진을 꼭 찍고 마음에 들면 포토샵(사진 처리 프로그램)으로 직접 처리해 보관한다”고 말했다. 디지털로 대변되는 신기술에 대해서도 그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영화는 과거의 경험을 현재로 끄집어내 미래로 가져가는 여행과도 같다. 그 과정을 디지털이 잘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디지털 카메라로 영화를 찍는 현상도 바람직하다 생각합니다. 사진과 영화가 예전에는 동떨어졌는데 이젠 디지털로 합쳐져 사진과 영상을 섞기 쉬우니 만족스럽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만든 후 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6년작 ‘까마귀 기르기’를 이번에 부산에 와서 처음 봤다”는 그는 “다른 사람 영화를 보는 듯 했는데 기분 뿌듯한 장면도 있었고 다르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이미 제작과정에서 충분히 즐겼고 모든 감정을 느꼈으니 제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죠. 사실 관객의 반응이 어떨까 불안하기도 합니다. 관객의 반응이 좋지 않아도 더 이상 바꿀 수 없으니 더욱 괴로운 것이지요.”
부산=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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