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재판결과를 받아보는 유일한 수단인 판결문의 양식이 10여 년 만에 크게 바뀐다. 사건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이름이나 주소 등의 '기초사실'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기존의 틀을 탈피해, 법률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필수적인 '요건사실' 중심으로 판결문 구조가 재편된다. 판결문은 더욱 간명해지고, 개인정보 등이 배제돼 사생활 침해 논란도 줄어들 전망이다.
10일 대법원에 따르면 법원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판결문 개선 태스크포스(TF)'는 약 4개월 간의 논의 끝에 판결문 개선방향을 확정 짓고 12월까지 민ㆍ형사 판결문 모범사례집을 발간하기로 했다.
현재 판결문은 보통 주문(판결의 결론)을 앞세운 뒤 '기초사실-주장-판단' 순으로 구성된다. 기초사실에는 전반적인 사건내용을 기재하고, 주장 부분에는 각 당사자의 청구내용과 반박을, 판단에는 재판부의 결정내용을 담는다. 이런 판결문은 한 번 읽어보면 사건의 내용을 모두 알 수 있어 '자기완결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판결문 분량이 늘어나고 논리적 흐름이 약해지는 한편, 개인정보 노출 등으로 감정적인 판결 불복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TF팀에선 10여년 전 사실상 폐기 처분된 '요건사실 중심의 판결문'을 다시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판결문의 특징은 우선 법적 판단에 필요한 사실들만을 기재한다는 데 있다. 즉, 강간사건을 심리할 때 '남성 A가 여성 B를 모텔로 데려가 강제로 성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제외한 여성의 이름이나 주소, 직업, 모텔의 소재 등은 판결문에 전혀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단, 판결문 송달 등에 필요한 개인신상 정보는 판결문에 포함되지 않고 별지로 첨부돼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다.
이와 함께 다툼의 여지가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피고와 원고의 주장과 이를 판단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각각의 쟁점에 대해 '주장-항변-재(再)항변-재재항변' 등의 정해진 논리적 순서로 입증하는 방식으로 판결문을 작성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요건사실 중심의 판결문'의 급격한 도입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실제 90년대 중반까지는 이 같은 요건사실 중심 판결문이 대부분이었지만, 지나치게 형식적이어서 비법조인이 이해하기엔 난해하고 현대사회의 복잡한 사건을 다루기엔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제기돼 98년 법원 예규가 나온 즈음부터는 사실상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요건사실 중심 판결문의 논리성과 간결성은 유지하되, 지나치게 형식적이었던 측면은 보완하기로 했다. 또 사건이 비교적 단순하면서 법관 업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형의 사건에 대해서는 요건사실 중심 판결문을 바로 적용하지만, 사건내용이 매우 복잡한 정보기술(IT), 특허, 기타 대규모 사건의 경우엔 기초사실 중심의 판결문을 그대로 사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단독 재판부의 경우 담당사건의 최소 70%가 새 판결문 적용대상일 것으로 추정돼 일선의 판결문 작성시간도 크게 단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준모기자 moonjm@hk.co.kr
임현주기자 korearu@hk.co.kr
강아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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