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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에세이] 마패와 유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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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에세이] 마패와 유척

입력
2010.10.10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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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중국 베이징에 출장 갔다가 자금성(紫禁城)을 관광할 기회가 있었다. 명ㆍ청 시대 황제의 궁궐인 자금성을 대표하는 최고의 건물 태화전(太和殿) 앞 뜰 양쪽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해시계와 저울과 자 등 표준 계량기가 들어있는 석탑이었다. 자동안내장치에서는 시간을 알리고 도량형을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의 상징이기 때문에 두 가지를 태화전 앞에 두었다는 해설이 나온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업적을 대표하는 것도 만리장성이 아닌 도량형(度量衡)의 통일이다. 길이 무게 부피를 재는 도량형의 통일은 백성과 관리와 황제의 측정 기준을 일치시켰다는 단순한 의미를 지나, 조세 상거래 지리정보 등의 통일된 기준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를 통해 실질적인 하나의 통일 국가로 통치하는 것이 비로소 가능해 졌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도 역대 왕조의 많은 성군 통치자들이 도량형을 정비하여 조세를 공평하게 징수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기록들이 남아있다. 이를테면 같은 면적의 땅이라도 날씨나 땅의 비옥하고 척박한 정도에 따라 수확량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공평하게 조세를 매기는 기준을 잘 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세종대왕 때 측우기와 같은 측정기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은 잘 알려진 예이다.

우리나라의 도량형이나 표준 제도 정착에 기여한 또 다른 제도는 암행어사 이다. 조선시대 후기 암행어사는 임명을 받을 때 임금님으로부터 네 가지 품목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어사 발령장인 봉서(封書)와 직무 규정집에 해당하는 사목(事目), 역졸과 역마를 사용할 수 있는 증표인 마패, 그리고 길이 20 cm 남짓한 놋쇠로 된 사각 막대에 눈금을 새겨 넣은 유척(鍮尺)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유척은 암행어사가 지방 수령이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는지를 판단하는 데 아주 중요한 도구였다. 당시 곡식이나 옷감 혹은 지역 특산물로 세금을 거둬 드리는 제도 아래에서, 백성들은 지방 수령이나 관리가 제 마음대로 만들어 사용하는 자나 되에 맞춰 세금을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상 상거래에서도 눈금을 조작하면 누구나 쉽게 부정을 저지를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 피해는 백성이나 나라가 보게 되므로 암행어사는 임금이 하사한 유척을 기준으로 삼아 그 지방의 도량형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공정한 조세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였다.

곤장을 비롯한 형벌 도구의 두께나 넓이 등을 규정에 맞게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지도 역시 이 유척으로 확인했다. 유척에 새겨진 5 종류의 눈금 중에는 악기 기본음의 기준이 되는 눈금, 예식에 사용되는 집기들의 규격을 측정하는 눈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듯 유척은 조세 상거래 형벌 등 부정부패 없는 바른 정치를 구현하는 일은 물론이고, 예술과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니 암행어사는 후세에 흔히 알려진 것처럼 탐관오리를 찾아내 징계하는 역할만 한 게 아니라, 오늘날의 국가 표준체계를 전국적으로, 그리고 모든 분야에 전파하고 점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왕조시대의 중앙집권적 통치와 통일된 국정에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정도면 암행어사를 상징하는 것은 마패가 아니라 유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용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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