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브 폰팅 지음ㆍ이진아, 김정민 옮김
그물코 발행ㆍ528쪽ㆍ2만5,000원
남미 서부 해안에서 3,200km 떨어진 외딴 섬 이스터. 1722년 부활절에 네덜란드의 로프헤펜 제독이 이 섬을 찾았을 때, 3,000명가량의 주민들은 갈대집이나 동굴에서 원시인처럼 살며 날만 새면 싸움질을 하고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는 끔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섬이 유명해진 것은 섬 전역에서 600여개나 발견된 최대 높이 10m의 거대한 석상 ‘모아이’ 때문이다.
야만의 섬에서 발견된 문명의 흔적을 놓고 온갖 해석이 난무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클라이브 폰팅은 수수께끼의 모아이 석상에 대해 “돌이킬 수 없이 환경을 파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섬뜩한 일례”라고 말한다. 씨족마다 고유의 종교와 세련된 의례를 갖고 번성했던 이스터 섬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석상을 만들고 이를 해안의 제사 장소까지 굴려 옮기기 위해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내면서 결국 몰락을 맞았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이스터 섬 사람들보다 더 잘 살아왔을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는 인류 출현 이후 지금까지 200만년의 역사를 생태적 관점에서 기술한 걸작이다. 1991년 첫 발간 후 13개국어로 번역되며 환경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이번 번역판은 3년 전 새로운 연구성과를 반영해 고쳐 쓴 원서 개정판(원제 ‘A New Green History’)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화두는 “사람 또한 지구 생태계의 일부”라는 것이다. 사람이 생존을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벌이는 활동은 어떤 형태로든 지구 생태계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고, 이는 인간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현생 인류가 출현해 각 대륙으로 퍼져나가고, 농경을 계기로 정착사회가 생겨나고, 고대문명과 수많은 제국이 흥망성쇠한 과정 등을 인간사회와 자연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세밀하게 그려나간다.
수렵 채취 시절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토머스 홉스의 말처럼 “구역질 나고 짐승같이 단명한” 생활이라는 것이지만,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인류사의 99%를 차지하는 이 시대 인간들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충분한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수렵 채취에서 농경으로의 전환을 흔히 ‘진보’라고 생각하지만,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 수확하려면 엄청난 노동이 필요한 반면 식량 부족이나 기근의 우려는 더 높아졌다. 저자는 인간의 눈에는 ‘진보’나 ‘승리’로 여겨진 변화들이 지구 환경에서 보면 ‘손실’과 ‘파괴’일 수 있음을 역설한다. 나아가 산업사회 등장 이후 지난 200년 동안 발생한 환경 문제는 “역사에 유례가 없고 해결책을 생각해내기에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서, 과연 산업사회가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지를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비관론을 내놓는다.
그러나 저자는 비판을 위해 목청을 높이거나 화려한 수식으로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소 지루할 만큼 차분하게 사실들을 촘촘히 엮어간 글에서 품위가 느껴진다. 일반적인 요즘 책들에 비해 빽빽하게 글자를 인쇄하고도 500쪽이 넘어(재생종이를 써서 그리 무겁지는 않다) 가볍게 읽을거리는 아니지만, 읽을수록 빠져드는 매력도 그런 품격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환경 문제를 공부하면서 환경운동에도 참여해온 번역자들의 공들인 번역도 깔끔하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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