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를 고를 때는 마른 잎, 젖은 잎, 우려낸 찻물 모두 녹색인 ‘3녹’을 기억하세요.”
5일 오전 서울 강남에서도 경제력 높은 사람이 거주하는 삼성동의 한 고급 아파트 생활문화지원센터. 주부 십 여명이 연잎 차를 음미하며 다도(茶道) 강의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20분 정도 강의가 이어진 뒤, 말쑥한 차림의 미래에셋투자증권 직원이 등장해 ‘브라질 국채’의 투자 매력을 설명했다.
대우증권 WM클래스 역삼역지점은 금융감독원뿐만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의 관리도 받아야 한다. 증권사 지점이기도 하지만, 미술작품도 전시하는 갤러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지점 복도 벽면에는 매월 주제에 맞춰 유명작가의 작품 10여점이 전시되며, 계약직이기는 하지만 두 명의 큐레이터가 근무하고 있다.
증시가 활력을 되찾은 탓일까. 올들어 고급 문화를 체험하는 감성마케팅이 증권업계에서 확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미래에셋이다. 이 증권사는 지난달부터 초우량(VIP) 고객 유치를 위해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와 반포 자이, 분당 정자동 등 고급 주거단지에서 ‘문화와 결합한 자산컨설팅’ 행사를 열고 있다. 강의 주제도 참석자들의 관심사를 미리 조사해 수지침, 피부관리, 음악회 등 다양하다.
신영증권도 지난달 임대료가 비싸기로 소문난 압구정동에 지점을 개설하면서 64㎡ 공간을 고객 전용의 카페형 갤러리로 꾸몄다. 남진우 지점장은 “책상과 음료수 시설이 갖춰진 공간을 지역 주민들에게 조건 없이 개방했다”고 말했다.
인근의 또다른 신영증권 지점인 청담지점에서는 지점장이 고품격 문화강사로 나서고 있다. 최근 2년간 독학으로 오페라 공부를 한 권형진 지점장이 스크린과 최고급 앰프 등의 시설을 갖춰 놓고 7월부터 감상회를 열고 있다. 그는 “유명 오페라 공연을 DVD로 감상하면서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 분석 등 인문적 지식을 얻는 방식인데, 최근 열린 감상회는 예약 첫날 정원 25명이 모두 찼다”고 말했다.
증권사들이 감성마케팅을 펼치는 이유는 뭘까.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고객 유인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미래에셋 정찬우 강남구청지점장은 “고객들의 수준이 높아져 이제는 무조건 금융 상품을 들이대는 시대는 지났다”며 “문화적 유대감을 형성하면 금융거래도 자연스럽게 시작된다”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도 “문화관련 행사를 하고 나면 약 20% 가량은 실제로 고객이 된다”며 “최근 두 번의 행사를 진행했는데, 행사에 참여한 40명 가운데 6명 가량이 계좌를 열고 1인당 수억원을 맡겼다”고 말했다.
숭실대 황원일 교수는 “증권사가 부유층 거주지역의 소매지점에서 감성마케팅에 집중하는 것은 주요 고객이 30~40대 주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인 남성은 전문가 컨설팅보다는 자기 방식대로 자산을 관리하려는 반면, 여성들은 컨설팅에 적극적인 동시에 문화에 대한 수요도 굉장히 많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신영증권 권 지점장은 “오페라 감상회를 통해 고객들과의 친밀도가 굉장히 높아졌으며, 이에 따라 우리 회사가 제공하는 투자조언의 진정성을 믿는 수준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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