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하고 연구하는,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지막엔 책이 업(業)이다. 책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간다. 쌓여서 고스란히 산더미 같은 짐이 된다. 두보의 말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를 실천하느라 나에게도 책이 가장 큰 짐이 되어버렸다. 은현리 은현시사의 책을 같은 마을인 은현리 청솔당으로 옮기는 데 100만 원이나 들었다.
이삿짐이 아닌 오직 책 옮기는 비용이 그렇게 들었다. 그 책들 헌책으로 팔면 그 값의 반의반도 못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들 버리지 못하는 것은 내게 보낸 저자의 서명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해 시집을 사 모았다. 시집을 방안 벽면의 길이만큼 모았을 때 그렇게 가슴이 벅찰 수 없었다.
이젠 아니다. 시집이 고통이다. 지금은 업이라서 이고지고 간다지만 내가 세상을 떠날 때 책과는 전혀 무관한 자식들에게 책은 아비가 남긴 유산이 아니라 '쓰레기'취급을 받을 것이 뻔하다. 이 고민은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 문학인 전체의 고민일 것이다. 이 고민 해결을 위해 이제 정부가 나서줬으면 좋겠다.
대형 건물을 지어 가치 있는 책만 선별해 기증자의 이름을 딴 문고들을 만들어 놓으면 어떨까. 아니, 어느 자치단체에서 이 사업을 독점하면 당장 '문학의 전당'이 될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종이책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 때 그 책들은 분명 귀한 선물일 것이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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