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의 팬텀,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콰지모도, ‘그리스’의 대니, ‘헤드윅’의 헤드윅, ‘시카고’의 벨마…. 이렇게 많은 뮤지컬 주인공들이 한 무대에 출연한 적은 없었다. 지난달 28일 개막한 ‘스팸어랏’만 빼고.
조금도 진지한 구석이 없는 ‘스팸어랏’은 마치 패러디의 종합세트 같다. 뮤지컬 고전들의 전형성을 보기 좋게 까고, 뮤지컬 제작 관행까지 꼬집는다. 이들의 목표는 첫째도 웃기기, 둘째도 웃기기, 셋째는 비꼬면서 웃기기. “인생 뭐 있나요~ 즐겨봐요”로 이어지는 노래가 작품의 주제를 압축한다.
극은 서로마제국 멸망 후 이민족의 침입을 겪던 영국을 구했다고 알려진 아서왕의 전설을 뒤집어 보는 데서 출발한다. 아서왕이라고 해서 모든 일이 잘 풀렸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타당한 접근이다. 하지만 적 앞에서 바지에 똥을 싸는 로빈 경, 왕자를 사랑해서 커밍아웃하는 랜슬럿 경 등 원탁의 기사들은 해도 너무하다. 성배를 찾으러 가는 도중 만나는 적들이라는 게 듣기 싫은 하이톤으로 아무 의미 없이 “니”라고 말하는 괴상한 기사 무리, 팔 다리가 잘리고도 “작은 상처가 났을 뿐”이라며 덤비는 지나치게 용감한 기사, 귀여운 모습으로 상대의 목을 댕강 잘라버리는 살인 토끼 등 엽기로 일관한다. (사랑 노래를 부르며) “야 침 튀겼잖아… 입 냄새까지 나”라고 하는 일차원적인 코미디도 빼놓기 아까운 부분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정서의 차를 극복하지 못하거나, 어색한 번역으로 극의 맛을 떨어뜨리기 쉽다지만 ‘스팸어랏’은 이런 우려들을 완전히 날려버린다. 노래, 춤보다는 대사에 초점을 맞추는 데도 최소 3분에 한 번씩은 폭소를 하게 만든다. 번역과 윤색의 힘은 브로드웨이에서 유대인 제작자들이 판치는 현실을 풍자했던 브로드웨이판을 스타마케팅에 목매는 국내 상황으로 바꾸어 버린 데서 최고조에 달한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이격감이 느껴지던 원작 영화 ‘몬티 파이튼의 성배’를 대중 코드에 맞춰 맛있게 각색한 에릭 아이들의 능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옥스퍼드대 출신 작가와 배우들로 구성된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튼’의 일원으로 원작 영화에도 출연했다.
제작사 오디뮤지컬컴퍼니에 따르면 국내 유명 통신광고 패러디 등 상당수의 키치적 요소는 배우들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 대표 주자가 개그맨 출신의 정상훈씨. 그는 돋보이는 조역인 기사 대장, 프랑스 수성군, 마법사 미미 등의 캐릭터를 구축하고 도맡았다. 관객들은 이제 그를 눈여겨보게 됐다. 아서왕 역을 나눠 맡은 박영규, 정성화씨의 코믹 연기는 초연임에도 안정적이다. 박씨는 가사 전달력은 좀 떨어지지만 ‘미달이 아빠’로 통하는 익숙한 억양이 인상적이고, ‘맨 오브 라만차’에서 돈키호테를 열연했던 정씨는 그 속편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내년 1월 2일까지, 한전아트센터. 1588-5212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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