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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5> 국어 사랑 나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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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5> 국어 사랑 나라 사랑

입력
2010.10.05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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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조선어 교과서가 따로 있었다. 이라고 했다. 일본어 교과서는 아예 이라고 했다. 조선인 학생들에게까지 국어는 다름 아닌, 일본말이었다.

그러던 중에 ‘최후의 수업’을 우리는 받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들 조선인 학생의 조선 말 공부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조선인 선생은, 그 날 그 수업 시간이 파하자 “이게 마지막이야. 더는 우리 말 공부를 못하게 되었어!”그러면서 교과서를 내려놓았다. 거기 눈물방울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그 순간, 3학년짜리 꼬맹이이긴 해도 우리들은 모두 울먹였다. 교실 안은 소리 없는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옛날에 돈 없는 나그네가 잡화상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는 문간에서 가게 안에 걸린 옷을 가리키면서 주인이게 물었다.

“저것이 무엇이오?”

주인이 대답했다.

“옷이요.(오시오)”

나그네는 가게 안으로 쑥 들어섰다. 그리고는 맛나 보이는 잣 열매를 가리키며

“이것이 뭐요?”

“잣이오.(자시오)”

주인의 대답이 떨어지자 나그네는 가게 안의 먹을거리를 닥치는 대로 먹어댔다. 배불리 공짜로 먹은 나그네는 마침내 갓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것이 무엇이요?”

주인은 당연히 “갓이오(가시오)”라고 대답했다. 나그네는 막무가내로 뒤도 안 돌아 보고는 가게를 나와 버렸다.

이것이 마지막 조선어 수업의 마지막 조선어 읽을거리였다. 지금도 어제 읽은 듯이 생생히 외고 있는 것은, 이 완벽한 코미디가 워낙 재미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3학년 마치고 4학년 들어서부터 오직 일본말을 국어로 쓰게 강요당했다. 조선어 쓰기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렇다고 가령, 쉬는 시간에 조선인 학생들끼리만 모여서는 일본 말을 쓸 턱이 없었다. 절대로 없었다. 아니 교실 안의 일본어 쓰기가 역겨워서도 크게 조선말로 떠들어댔다. 물론 선생들 안 보이는 틈을 타서 우리는 조국애를 발휘했다.

“오늘 조선 말 쓴 학생은 손들어!”

일본인 담임선생은 하루 수업을 마친 뒤에 으레 우리에게 이같이 요구했다. 초등학교 5학 년 때 일이다. 새로 우리 반 담임을 맡은 일본인 선생은 그 당시 일본 식민지 정책이 내건 이른바, ‘국어 상용’에 열을 올렸다.

‘국어상용(國語常用)!’. ‘국어를 언제나 써라!’라고 외쳐댄 그 구호에서 국어는 다름 아닌 일본말이었다. 조선말을 못 쓰게 배척하는 것이 그 주목적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당시, 초등학교의 에서도 국어는 으레 일본어를 의미했다.

“오늘 조선 말 쓴 학생은 손들어!”

그 말이 떨어지면 우리 반 학생 전부가 으레 손을 들었다.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만세라도 부르듯 했다. 그건 항의요 저항이었다. 아주 떳떳하게 이유 있는 반항이었다.

“다들 바지 걷어 올리고 책상에 올라 서!”

우리들은 다들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그게 매일 방과후마다 벌어졌다. 우리는 계속 손들었고 선생은 계속 매질을 되풀이했다. 한데 그런 중에 묘한 일이 벌어졌다. 공교롭게 충청도에서 전학 온 학생이 생겼다. 그의 고향 말을 우리는 충청내기라면서 헐뜯었다. 그렇게 우리가 흉보는 게 싫었던지, 그는 조선말을 쓰질 않았다.

그래서 그는 조선말을 쓰는 무리에 껴들지 않았다. ‘국어상용’을 했다. 당연히 그는 조선어 쓴 것으로 해서 손을 들지 않았다. 회초리 맞을 턱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 반 친구들이 그를 그냥 두질 않았다. 수업 마치고 교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다들 번갈아 가면서 그를 구타했다.

“손 안 든 녀석 우리에게서 맞아봐!”

글쎄, 그건 우리들의 조선말 사랑의 소행이었을까? 아니면 그만 혼자 회초리 안 맞는 게 원통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치에 맞은 항일운동이었을까?

어린 것들이 뭘 알았을까? 그렇겐 말하지 말자. 날 때부터 조선말이 알차게 익어 있던 입에 난데없이 일본말을 하자니, 그게 무슨 병신 육갑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우리들의 손들기와 종아리 맞기는 한 달도 더 계속된 것인데, 그 반복이 지루했을까, 담임선생은 그걸 그만 두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의 우리들의 조선말 쓰기는 더 한층 흥청댔다. 우리 꼬맹이들은 애국지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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