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17ㆍ가명)아, 먼저 국어 하(下)부터 풀어. 정답도 있으니까 채점도 해 보고. 힘들어도 열심히! 홧팅(파이팅)!"
중간고사(1~5일)를 앞두고 유진이는 지난달 담임 선생님에게 소포 한 통을 받았다. 힘내라는 격려편지와 함께 '출제 예상 문제집'이 들어있었다. 수업 후 틈틈이 만든 각종 문학 작품의 핵심 내용과 이를 간추린 문제가 빼곡히 정리돼 있었다.
담임 교사가 딱히 유진이만 예뻐해서는 아니다. 유진이는 자신이 재학중인 전북의 모 고교에서 멀리 떨어진 인천의 미혼모쉼터 자모원(injamo.or.kr)에 머물고 있어 수업을 받을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때 집을 나갔고, 중풍을 앓던 아버지마저 중 1때 돌아가신 뒤로 유진이는 작은아버지 댁에서 지냈다. 친지라고는 하지만 '눈칫밥'을 먹을 수밖에 없던 처지. 가출도 여러 차례 생각했지만 딱히 갈 곳도 없었다. 고1 때 만난 남자친구는 그런 유진이에게 큰 위안이 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년 여 뒤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되면서 우울증에 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뱃속에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집을 나와 지난달 자모원에 왔을 때 유진이는 임신 4개월째였다. 자모원에 온 뒤 "장래를 생각해서 빨리 낙태하라"고 종용하는 두 언니와도 연락을 끊었다. 또래 친구들과 학교에서 웃고 떠들며 지낼 나이, 하지만 한 생명을 품은 유진이는 먼 타향에서 홀로 지내며 곧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사실에 불안해 하고 있다. 자모원 관계자는 "심리상담도 받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우울증도 많이 나아지고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 지난 7월 자모원이 전국 최초로 '대안위탁교육기관'으로 지정돼 유진이는 이곳에서 수업을 받으며 학적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미혼모들이 장기결석으로 인해 퇴학이나 자퇴 처리되는 우려가 사라진 것이다. 유진이와 비슷한 처지로 이곳에서 대안수업을 받고 있는 10대 미혼모는 모두 11명(중등 5, 고등 6).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10시~낮 12시, 오후 2~4시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등 일반 과목과 피아노 중국어 비누공예 등 특별활동, 태교 생명교육 등 인성과목 수업이 이뤄진다.
전직 교사, 학원 강사 등 자원봉사자 12명이 이들의 공부를 돕고 있다. 지난주부터는 인천시교육청의 지원으로 인터넷 동영상 강의 '잎새방송'(ibse.co.kr)도 무료 수강하고 있다. 중등 영어를 맡고 있는 고미야(55ㆍ여)씨는 "대다수 아이들이 기초실력이 부족한 편인데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애들도 함께 있어 수업 진도나 난이도를 맞추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했다.
대안학교로 지정은 됐지만 아직 정부로부터 예산 지원이 없어 시설이나 교육프로그램 등에 부족한 점이 많은 형편. 이날 수업도 산모 체조실인 지하 강당에서 진행됐다. 신지영 자모원 원장은 "교과서나 참고서 등 교재 구입비도 만만치 않아 나중에 대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인근 서점에서 외상으로 샀다"고 말했다.
자모원 생활을 마치고 나가면 미혼모 학생들은 원래 학교로 돌아가거나 전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육아 대책이 없는 한 결국 학업을 중도 포기할 가능성이 높은 게 현실이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정범구 민주당 의원은 "청소년 한부모가구 자립지원 사업의 중점을 그저 검정고시 비용 지원에 두는 것은 학생 미혼모의 자퇴를 종용하는 것과 같다"며 "이들의 학습권과 인격권을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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