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무슨 음악회 한번 볼끼라꼬 산행을 다하네." 아주머니가 남편에게 연신 구시렁거렸다. "아빠, 그만 내려가자." 초등학생 딸도 힘에 부쳤던 모양인지 아버지를 보챘다. 해발 870m의 경북 봉화군 청량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험준한 산세로 길 경사가 원체 가팔랐다. 한 걸음마다 근력의 압박감이 묵직했다. 게다가 애꿎은 비까지 추적추적 들었다.
30분 정도 오르니, 청량사 주변은 이미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든 사람들도 빼곡했다. 산비탈에 들어선 절이어서 넓은 공간이 없다 보니 음악회 무대만 세워져 있지 따로 마련된 객석도 없다. 사람들은 대웅전 앞 작은 마당에서부터 절 주변의 언덕, 바위 등 앉을 만한 틈새는 남김없이 차지했다.
음악회로 치면 최악의 조건이지만 사람들은 올해도 기어이 찾아왔다. 비 때문에 예년에 비해 다소 줄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4,500여명의 인파였다. 올해로 10년을 맞은 청량사 산사음악회가 지난 2일 다시 열렸다. 지난 두 해 수해와 신종플루로 건너뛰어 3년 만에 열린 것인데, 산사음악회로선 말하자면 '왕의 귀환'이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음악회지만 그게 바로 청량사 산사음악회의 매력적인 운치다. 절 주변의 아스라한 절경 자체가 객석 아닌 객석이 됐고, 그 어울림 속에서 음악이 자연과 공명했다. 짧고도 굵은 산행은 그 세계로 들어가는 입문 과정인 셈. 전국 사찰에 산사음악회 붐이 조성된 것도 이 곳 때문이다.
오후 7시. 은은한 트렘펫 연주가 절 옆에 우뚝 솟은 금탑봉에서 울려 퍼졌다. 뉴트리팝스오케스트라의 단원 한 명이 봉우리 기슭에 홀로 올라 연주한 것인데, 청량산 열두 봉우리 품에 깃든 사찰의 절경을 이용한 환상적인 개막 연주였다. 무료 음악회라면 으레 등장하기 마련인 후원자들의 인사말 퍼레이드 없이 음악회는 곧장 본격적인 공연으로 이어졌다. 올해 음악회의 주제는 '초심'. 10년 전 첫 음악회를 열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로 첫 회에 출연했던 가수 안치환, 한영애씨가 10년 만에 다시 초청돼 열창했다. 당시 "여기 무대 맞아요?"라며 놀라워했다는 안치환씨는 평소 자신의 가장 인상적인 공연의 하나로 이 음악회를 꼽는다고 한다.
최근 드라마 '선덕여왕'과 '동이'의 촬영지가 되기도 한 청량사는 지금이야 등록 신도가 1만명이 넘고 등산객을 포함해 연 평균 25만여명이 찾는 이름난 절이지만 한 스님이 오기 전까지는 무명에 가까웠다. 주지 지현(智玄ㆍ53ㆍ사진) 스님이 1984년 이곳에 부임했을 때 절은 비가 새는 법당 하나만 덜렁 남은 폐사나 다름없었다. 초파일날 찾아온 신도는 달랑 27명. 스님은 경운기를 타고 주민들의 농사를 거들고, 마을회관에서 유례없는 '출장법회'를 열며 주민 속으로 들어갔다. '주는 불교'를 표방한 그의 포교는 결국 주민들의 화답으로 돌아왔다. 화제가 됐던 독립영화 '워낭소리'의 노부부도 청량사 신도여서, 자연스레 영화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지현 스님이 특히 힘을 기울인 것은 문화ㆍ복지 포교. 지역의 예술가들과 함께 시화전, 회화전 등을 열며 사찰을 지역문화센터로 가꿨다. 산사음악회도 그 하나로 마련된 것이었다. 음악회는 정형화된 틀 없이 해마다 주제를 잡아서 구성했는데 어느 해에는 북소리만으로 공연을 채우기도 했다. "이라크전쟁이 한창이던 2005년에는 신부, 목사 등 이웃종교인들과 스님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평화를 기원하는 공연을 했는데, 주민 반응이 너무 뜨거웠어요. 이름있는 대중가수가 나오지 않아도 주민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를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역 복지단체 일을 맡아 장애인ㆍ아동 복지사업도 활발히 벌이는 그의 무대는 이제 봉화를 넘어서 있다. '함께 하는 시민행동' 공동대표로 시민사회활동에도 깊이 참여하고 있고, '좋은 벗 풍경소리'라는 단체를 이끌며 찬불가와 찬불동요 보급에도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조계종을 이끌 차세대 지도자로도 꼽힌다.
두 시간여 진행된 음악회 내내 비는 그치지 않았다. 인사말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지현 스님은 "비 오는 날 이렇게 많이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아주 짧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3년 만에 돌아온 청량사 산사음악회는 제법 쌀쌀한 빗속의 음악회가 됐지만 마음은 더 없이 청량해진 듯했다.
봉화=글ㆍ사진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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