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낮 12시(현지시간) 독일 북서부의 중소도시 브레멘의 한 컨벤션센터. 1,200여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축제가 진행됐다. 오케스트라의 합주에 이어 돛단배를 형상화한 무대에서 뮤지컬 공연이 시작됐다. 그 다음은 오페라와 합동 연주가 이어졌다.
행사는 한 시간 남짓 차분하게 진행됐다. 정확히 20년 전 이날 서독과 동독은 통일을 선언하고 '하나의 독일'로 다시 태어났다. 이날 뮤지컬의 주제도 '우리 모두는 한 배에 탔다' 였다. 크리스티안 불프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총리 등 독일 국가기관의 주요 수장들도 이날만큼은 유쾌한 축제에 기꺼이 구경꾼으로서 동참했다.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유럽연합(EU) 27개국 정상들을 모두 불러 떠들썩한 잔치를 벌였던 지난해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상당수 시민들은 "작년이 통일 20주년이 아니었느냐"고 반문했다. 문태영 주 독일 대사는 "독일인들에게는 통일 선포라는 격식보다 통일의 단초를 제공한 장벽 붕괴의 상징성이 더 깊이 각인돼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20년 전 통일의 흥분은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사실 동ㆍ서독 통합은 장밋빛 미래를 확신했던 동독 주민들의 바람과 통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서독 정부의 의지가 빚어낸 타협의 산물이었다. 유진숙 배재대 교수는 "동독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서독 체제에 편입되길 원했고, 서독 정부가 1대1 화폐교환을 비롯한 파격적인 유인책을 제안함으로써 독일 통일은 일거에 국내외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어쨌든 독일 통일은 평화로우면서도 속도감 있게 전개됐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그 대차대조표는 어떻게 됐을까.
'정상국가'를 오롯이 복원한 독일은 오늘날 세계 정치ㆍ외교를 주무르는 슈퍼 파워로 우뚝 섰다. 하나된 독일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대표적 사례가 2003년 발발한 이라크전쟁이었다. 독일은 국가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의 참전 요구를 끝내 거부했다. 최근 메르켈 총리는 "20년 동안 긍정적 변화가 가득했다"면서 자부심을 한껏 드러냈다.
경제 통합의 성과에 대해서는 분석이 엇갈린다. 일단 수치만 보면 경제적 통일도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독 지역의 1인당 평균 임금은 구 서독 지역과 비교해 1991년 58%에서 지난해 83% 수준까지 올라 왔다. 소득 격차도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실질적 격차는 크다..
동독 지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08년 기준으로 서독의 70.9% 수준에 불과하다. 민간경제연구소들은 동∙서독의 실질 소득 격차는 이보다 더 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올해 11.5%로 서독 지역(6.6%)의 두 배에 달한다. 그런데도 동독에서 양질의 노동력은 태부족이다. 9월 발표된 독일 정부의 '통일과정 보고서'는 그 원인을 "통일을 계기로 우수 인재들이 대거 서독 지역으로 떠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통일 이후 동독 인구도 10% 가량 감소했다. 구 동독 주민들이 여전히 '2등 국민'이라는 박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통일 이후 동쪽(Ost)과 서쪽(West)에서 각각 유래한 '오시'(Ossiㆍ게으른 동독 사람)와 '베시'(Wessiㆍ거만한 서독 사람)란 용어는 지금도 양쪽 주민들의 '마음의 벽'을 곧추세우고 있다.
감정의 골은 생각보다 깊어 보였다. 구 동독의 마지막 총리였던 로타르 드 메지에르는 이날 "통일을 기억할 만한 상징적 조치들이 행해지지 않은 점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1990년 12월 출범한 연방하원을 1대 통일 의회가 아닌 서독 정부의 12대 의회로 한 것이나 동독을 불법국가로 단정한 인식 등이 그렇다는 것이다. 독일 통일은 완성된 게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브레멘(독일)=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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