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격동기의 모스크바 국영호텔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야채는 양배추, 캐비지(cabbage)뿐이었다. 고려인 동포 가정에 초대받아 갔더니 양배추와 고춧가루만으로 담근 허연 김치가 나왔다. 그래도 그게 조선사람 뿌리를 자랑하는 소재였다. 그러나 통제경제가 무너진 틈을 타 번창한다는 모스크바 중앙시장에 갔더니 진짜 배추 동치미가 함지박에 가득했다. 고추와 마늘 장아찌 등 없는 게 없었다. 우리 재래시장 상인처럼 앞치마에 돈주머니를 찬 여인네들은 백러시아계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다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공급한다고 했다.
■ 그 몇 해 전, 영국 연수 때 만난 유학생과 동포 가정도 대개 양배추 김치를 담가 먹고 있었다. 우리 배추가 없으니 그러려니 했다. 물정에 웬만큼 익숙해져 중국인 가게를 찾았더니 한국 배추가 있었다. 양배추보다 2~3배는 비쌌을 것이다. 그래도 반갑게 사서 먹었다. 얼마 뒤, 테스코(Tesco)인지 세인즈버리(Sainsberry)인지 대형 할인점에서 똑 같은 배추를 더 싼 값에 파는 것을 발견했다. 스페인에서 온다고 했다. 중국 배추(Chinese leaf)라고 쓰여 있었다. 그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이었다.
■ 그 후 독일에서는 처음부터 중국 배추를 찾았다. 시행착오를 피한 것이 내심 흐뭇했다. 겨울을 앞두고는 서울에서보다 많은 배추를 샀다. 그 즈음 한국에 비하면 아주 값싼 고급생선 대구를 넉넉히 잘라 넣고 김치와 동치미를 담갔다. 동포에게 자랑 삼아 얘기했더니, 자기들은 네덜란드 동포가 알뜰시장처럼 트럭에 싣고 와 파는 배추를 훨씬 싸게 산다고 했다. 동포사회에는 새로 온 동포가 시행착오를 겪기 전에는 살림의 지혜를 일러주지 않는 경향이 더러 있다.
■ 가을 배추 파동이 심상찮다. 미국산 쇠고기 소동보다 실제 느끼는 혼란이 크다. 있는 사람은 몰라도 서민들은 난리다. 그러나 기상이변 등이 겹친 파동에 사회가 반응하는 모습은 어딘지 어설프다. 정부의 물가 관리 소홀을 탓하는 건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4대강 사업을 나무라는 것은 오히려 한가하다. 대통령의 '양배추 김치'발언 시비도 졸렬하다. 그보다는 먼저 시장의 수급 균형이 깨지면 과거보다 큰 혼란이 온다는 걸 깨닫고, 대체 소비와 긴급 수입 등으로 대처하는 지혜를 되새길 때이다. 중국 농산물은 온통 나쁘다고 치부한 것도 반성할 만하다. 그래야 중국 배추로 얼마간 메울 게 아닌가. 세상이 바뀐 만큼 생각도 달라져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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