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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64) 30년 재야운동 결실 민중당, 끝내 해산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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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64) 30년 재야운동 결실 민중당, 끝내 해산되다

입력
2010.10.03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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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이 정치세력화(정당화)해야 한다고 내가 생각한 것은 87년 6월민주항쟁 후 양 김씨의 후보분열로 민주화를 놓친 다음 더 이상 양 김씨에 의존해서는 민주화를 이룰 수 없겠다고 판단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6ㆍ29선언이 있고서도 1년 반 넘게 구속돼 있었고, 1988년 12월 석방돼서는 전민련 사무처장직을 맡게 돼 정당건설을 추진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전민련 사무처장으로서 노동자들의 파업 지원과 중간평가투쟁 등 민중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으나 민중운동은 오히려 위기를 맞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에 따른 공안정국의 도래도 한 원인이었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국민이 희망을 걸 집권대체세력이 없는 것이었다.

공안정국 속에서 민중운동이 위축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더 이상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미룰 수 없다고 보아 ‘합법정당’의 건설을 주창하게 됐다. 전민련 상임집행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고 특히 김근태 정책실장이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합법정당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에서 그 이유를 밝힌 문건을 제출하기로 해, 찬성하는 문건은 내가 쓰고 반대하는 문건은 김근태가 썼다.

그런데 정당이면 정당이지 ‘합법정당’이란 말이 왜 사용됐는지를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그 당시의 운동이론이나 운동권 정서로는 정당이라고 하면 당연히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비합법전위정당’을 의미할 뿐이어서 비합법전위정당이 아니라 합법적인 대중정당이란 뜻에서 ‘합법정당’이란 말을 쓰게 됐다.

그러면 나는 왜 합법정당의 건설을 주창했는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민주화를 위해서든 민중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든 국민이 희망을 걸 수 있는 집권대체세력이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민중진영은 민주화와 민중생존권보장을 위해 투쟁하게 돼 있었는데 집권대체세력이 형성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운동의 발전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운동의 약화를 가져오게 돼 있었고, 특히 국민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돼 있었다. 그래서 집권대체세력으로서의 합법정당 건설이 요구됐다.

그리고 민중운동의 목표인 인간해방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선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비합법전위정당’이든 ‘합법정당’이든 정당을 건설해야 하는데, 나는 합법정당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내가 합법정당을 주창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운동의 이념과 전략이 바뀌어야 한다고 본 데 있다. 노동자계급의 상대적 진보성이 인정되던 초기자본주의사회에나 통용될 수 있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전략을 탈자본주의사회 운운하는 지식정보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더라도 사회경제적 토대로서의 하부구조가 바뀌면 상부구조로서의 이념과 전략도 바뀌어야 했다. 나는 오늘의 세계적 대변화를 삶의 총체적 양식으로서의 문명의 전환 곧 정보문명시대의 도래로 보고, 새로운 진보이념으로서 민중주체민주주의를 제시한 바 있는데, 운동권이 이런 이념과 전략에 따라 바뀌게 하려면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보았다.

합법정당을 반대하는 쪽은 ‘시기상조론’을 폈는데, 그 근거는 주로 민중운동이 덜 발전해 있고, 특히 노동자계급이 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합법정당을 건설하면 운동이 개량화할 뿐만 아니라 운동역량이 분산돼 지배세력의 탄압을 견뎌내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민중운동역량이 더 성장한 다음에 합법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거였다.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전략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비합법전위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보아 합법정당을 반대한 사람들도 많았다.

많은 논란 끝에 1989년 9월 전민련 중앙위원회에서 결론은 냈는데, 어차피 합법정당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갈려 있는 상황에서 표대결을 하면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진다고 보아 합법정당을 찬성하는 쪽은 전민련 간부직을 사임하고 합법정당 건설에 나서고 반대하는 쪽은 전민련 활동을 계속하기로 절충했다.

그래서 나는 이우재, 조춘구, 이호웅, 정문화, 정태윤, 원혜영, 안희대, 박계동, 염만숙 등과 함께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을 결성해서 정당 건설을 준비하는 가운데, 이부영의장과 이재오위원장의 석방을 계기로 고영구, 홍성우, 제정구, 유인태 등이 동참해서 ‘민중의 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민연추)를 결성했다. 그러나 민연추 상태에서 야권통합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과 독자적으로 창당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돼, 이부영, 제정구, 여익구, 유인태, 원혜영, 박계동 등 야권통합정당을 주장한 사람들이 민연추를 탈퇴함으로써 이우재, 이재오, 조춘구, 정문화, 정태윤, 염만숙 등에다 새로 동참한 김낙중, 김상기, 오세철, 지은희, 김문수, 신철영, 유인렬 등과 함께 1990년 11월 10일 민중당을 창당했다.

민중당은 운동권의 총본산인 전민련의 결의에 따라 창당된 정당은 아니었으나 운동권의 중심인물들이 창당한 정당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30여년간 성장해온 한국의 재야운동권이 정당을 건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초기에는 시기상조론자들의 불참으로 다음에는 야권통합론자들의 탈퇴로 재야운동권이 결집한 정당이 되지 못했는데, 이것은 역사적 과오였다.

시기상조나 야권통합을 주장한 사람들은 보수야당을 통해 국회의원 상당수를 확보한 다음 운동권 중심의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아무튼 민중당은 나름대로 엄청난 노력을 경주했으나 1992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정당의 존립에 필요한 2%이상을 득표하지 못해 해산되고 말았다. 지금은 정당투표제와 2%이상 득표 정당 국고보조금 지원, 당비의 세액 공제 등의 제도가 있으나 그때는 그런 제도가 없어 정당의 유지 자체가 어려워 해산의 아픔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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