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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52> 면암 최익현의 '의병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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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의 문향] <52> 면암 최익현의 '의병격문'

입력
2010.10.03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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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은 화서 이항노(李恒老)의 문하에서 배운 독립운동가로 일제의 침략정책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 가서 순절한 애국지사이다. 1894년 청일전쟁 뒤에 일본은 조선 식민지화를 획책, 친 러시아 성향의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했다. 1904년 2월에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행, 2월22일에는 우리 독도(獨島)를 다케시마(竹島)라 하여 제나라 시마네 현(島根縣)에 편입시키는 침략을 저질렀다.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오십 쪽 셋째 줄”(정광태;이렇게 구성진 노래는 북녘에서도 인기가 높아, 국가 정보원이 발표한 북조선 인민이 즐겨 부르는 남한 가요 5곡 가운데 하나라고, 노래는 “대마도는 몰라도”라는 구절도 나온다.

일본이 독도 침탈 극을 일으킨 이해(1904) 3월 2일 일본공사가 한일의정서를 성토한 면암과 허위(許蔿)를 엄중 처벌하도록 한국 정부에 요구하고, 11일에는 일본 헌병대장이 직접 이들을 잡아 가두었다. 3월 일본군이 청나라 봉천(奉天ㆍ지금의 선양(瀋陽))을 점령하고는, 여세를 몰아 4월 8일 일본 내각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대하여 일본의 보호권 확립을 결정했다.

1905년 이른바 을사 5조약이 강행 처결되자, 면암은 74살의 고령으로 조상 묘소에 하직하고 낙안(樂安) 군수를 지낸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200여명 의병을 모아, 6월4일 태인(泰仁)에서 정읍으로, 다시 흥덕을 거쳐 순창(淳昌)에 이르렀을 때에는 의병이 500명을 넘었고 순창에 이르렀을 때에는 800명에 이르렀는데, 뜻밖의 황제의 해산령을 접한 면암은 통곡하며 해산했다.

"아, 저 일본의 적(敵)은 실로 우리의 백대의 원수로서, 임진왜란에 이능(二陵)의 화를 입은 것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또한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맺어 한갓 외국의 엿보는 바가 되게 하였다. 수호조약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공갈협박의 환란이 문득 이르러 우리의 정부를 능멸하고, 우리의 도망한 역적을 감싸주며, 우리의 강상(綱常)을 어지럽히고, 우리의 의관(衣冠)을 부쉈으며, 우리의 국모(國母)를 시해(弑害)하고. 우리 임금의 머리를 깎는가 하면, 우리의 관원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백성을 도륙(屠戮)하였고, 우리의 묘지와 재산으로써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는가. 이러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저들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호라, 작년 10월에 저들이 한 행위는 만고에 일찍이 없던 일로서......우리 의병군사의 올바름을 믿고, 적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지 말자. 이에 격문을 돌리노니, 도와 일어나라”( 격문 인용, 이광린.신용하 편저 일지사 참조)

면암은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의 재판을 받고,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유배 3년, 1907년 1월 1일 면암은, 단식 끝에 왜(倭)의 땅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대마도 수선사(修善寺) 묘역에 그의 순국비가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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