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0월 2일 저녁 동베를린 샤우슈필하우스(국립극장).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로 선출된 마지막 총리 드 메지에르가 연단에 섰다. 그는 "이별은 슬픔을 의미하지만 오늘 동독과의 이별은 기쁨이요 모든 동독인에게는 희망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동독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의 손이 허공을 갈랐고,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졌다. 발코니의 귀빈석에는 헬무트 콜 서독 총리, 폰 바이체커 대통령, 드 메지에르 동독 총리가 함께 앉아 웅장한 합창과 연주를 경청하고 있었다.
독일 통일이 공식 선포되기 하루 전 전야제의 모습이다. 그때 전 세계는 감격했고, 우리 국민들도 그랬다. 많은 한국인들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솟아 오른 열망과 갈증에 목이 꽉 막혔을 것이다.
독일 통일사례, 우리 일일 수도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그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남북의 기세싸움 와중에서 남한의 대북 지원은 끊기고 금강산 관광은 중단됐으며 천안함은 격침됐다. 이제 남한 미국 일본, 북한 중국 러시아가 각각 한 편이 돼서 패싸움을 하고 있다. 급기야 북한은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 3대 세습체제를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가래떡을 씹지 않고 먹다가 체한 것처럼 답답한 형국이다.
그러나 세상사에서 극적인 반전은 얼마든지 있다. 헬무트 콜도 회고록에서 "통일이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고 했다. 북한의 3대 세습은 그만큼 위기의 농도가 짙고 언제든지 급변사태가 날 수 있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준비만 한다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역사적 결과를 거둘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준비하느냐이다. '비핵ㆍ개방 3000'처럼 "우리 말 잘 들으면 3,000달러 소득이 되도록 도와주지"라는 식의 접근법으로는 어림없다. 철저한 대북 봉쇄로 북한의 경제난을 가중시켜 괴멸시키자는 노선도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북한을 엄호하는 중국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중국은 기세등등하다. 비록 품격은 높지 않지만, 힘에 있어서는 일본을 굴복시킬 정도다. 북한 급변사태 시 중국 군대가 진주한다면 속수무책이다. 독일 통일 때 결정적 키를 쥐고 있던 소련은 붕괴 직전이었고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열린 지도자였지만, 중국 지도자들은 남한으로의 통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힘으로 제압할 수 있을까. 한반도의 절멸을 각오하지 않는 한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답은 뻔하다. 김정일ㆍ김정은 과도체제를 개방과 교류협력 쪽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것이다. 김정은은 남한, 미국과의 대립과 위기 조성을 통해 군부를 장악하는 강성의 길을 걸을 수도 있고, 민생고 해결로 정통성을 확보하려 할 수도 있다. 후자 쪽으로 견인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적절한 타이밍에 대북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물론 금강산 관광객 피살, 천안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도 없고 북핵 문제가 매듭되지도 않았는데 대북기조를 전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상상력과 정치력이 필요하다. 너무 조급하지도, 늦지도 않게 서로 신뢰할 만한 채널을 통해 대화를 시작해 적절한 수준의 사과와 과감한 지원, 그에 따른 몇몇 조건들을 주고받아야 한다.
'통일지도자'되기는 하기 나름
과감한 지원이 김정은 체제를 안정시킬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평화를 담보하는 최소한의 성과는 거둘 수 있다. 만약 서독이 동독에 했던 것처럼, 지원에 따른 조건과 교류협력이 북한 사회의 변화를 유도해 궁극적으로 급변사태를 초래한다면, 지원을 아끼지 않은 남한은 형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우리에 의존하는 구조만 된다면, 급변사태는 기회이겠지만 반대의 경우 그것은 재앙일 뿐이다. 좌파인 빌리 브란트가 닦은 동방정책의 결실을 우파인 헬무트 콜이 거두었듯이 MB도 어떤 결단을 하느냐에 따라선 통일지도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영성 편집국 부국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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