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회가 3개월째 스캔들로 들썩이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오랜 세월 한 갑부로부터 거액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다. 돈을 준 갑부는 세계 최대의 화장품 회사 로레알의 상속녀 릴리안 베탕쿠르(88). 이름하여 '베탕쿠르 스캔들'이다.
●베탕쿠르는 재산이 200억달러(포브스 집계)에 달하는 세계 열일곱번째 부자. 이 갑부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돈을 둘러싼 분쟁과 의혹
사건은 2007년 베탕쿠르와 그의 외동딸 프랑수아즈 베탕쿠르 메이어(57)의 재산 분쟁에서 시작됐다. 베탕쿠르는 '40년 절친'인 사진작가 프랑수아 마리 바니에(63)에게 1990년대 중반부터 고가 예술품, 생명보험증서, 부동산, 현금 등 10억 유로에 달하는 선물을 주고, 그를 자신 재산 일부(8%)에 대한 상속인으로 지정하기도 했다(올해 7월 명단에서 삭제).
그러자 딸은 '바니에가 고령으로 분별력이 흐려진 어머니를 이용해 재산을 가로챘다'며 그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고, 이에 베탕쿠르 측은 '딸이 어머니의 재산을 장악하려 한다'며 맞섰다.
이 과정에서 올 6월 딸은 베탕쿠르와 회계 담당자의 대화가 녹취된 테이프를 수사팀에 제출했는데, 여기에는 바니에 관련 내용 외에 베탕쿠르가 정치인들에게 돈을 건넸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어 12년간 베탕쿠르의 회계사로 일했던 인물의 증언까지 나오면서 프랑스 정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 증언에 따르면, 사르코지가 파리 외곽의 부촌(富村) 뇌이 쉬르 센 시장으로 당선된 83년부터 그 지역에 살던 베탕쿠르에게 정기적으로 돈 봉투를 받았으며, 2002년 대선 때도 15만 유로(약 2억3,000만원)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에릭 뵈르트 노동부 장관도 베탕쿠르의 탈세를 도와준 혐의를 받았다. 이와 관련, 프랑스 경찰은 지난달 베탕쿠르의 자택과 프랑스 집권당인 대중운동연합의 중앙 당사를 압수 수색하기도 했다.
세계 최대 화장품 그룹, 침묵하는 오너
"난 소중하니까요!"라는 광고 문구로도 잘 알려진 '로레알 왕국'의 역사는 10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업주는 화학자로 1909년 무자극성 염색약을 개발해 작은 가게를 낸 유젠 슈엘러(1881~1957년). 베탕쿠르는 그의 외동딸이다.
낮에는 미용사들에게 염색약을 팔고, 밤에는 실험실로 썼던 이 가게가 오늘날 500여개의 화장품ㆍ미용 브랜드를 거느리고 150여개국에 진출한 로레알의 산실이었다. 랑콤, 비오템, 바디샵, 메이블린 등 내로라하는 세계적 브랜드도 모두 로레알 소속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읜 베탕쿠르는 아버지와 유대가 유난히 끈끈했다고 한다. 열다섯 살 때 아버지 회사에 견습직원으로 들어갔던 베탕쿠르는 스물 여덟에 60~70년대 내각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정치인 앙드레 베탕쿠르(1919~2007년)와 결혼해 딸 프랑수아즈를 낳는다.
5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유산을 상속받은 그는 현재 로레알 지분 31%를 소유하고 있는 최대주주다. 베탕쿠르는 이사회에는 참여하지만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에게 전적으로 맡겨왔다. 단, 아버지의 창업정신인 '연구와 혁신'이 계속 이어지도록 애써왔다고 한다.
그는 과학 분야에 대한 지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87년 남편, 딸과 함께 '베탕쿠르-슈엘러 재단'을 설립해 과학 교육과 연구사업 등을 지원하고 있다. 해마다 유럽 최고의 바이오 의학 연구자에게 주는 '릴리안 베탕쿠르 생명과학상'도 이 재단이 지원한다.
로레알은 세계 굴지의 화장품 그룹이지만 동물을 이용한 성능실험, 광고 모델 선발에서의 인종 차별, 과장 광고 논란 등으로 여러 번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논란에 대해서 베탕쿠르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오너'였다.
그가 언론 노출을 피하는 것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고, 나치와 연관된 가족의 과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베탕쿠르의 아버지 슈엘러는 1930년대에 프랑스의 파스시트 그룹 '라 카굴(La Cagoule)'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남편 앙드레도 이 모임에서 활동했다. 두 사람은 2차 대전 때도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도 프랑스 여성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로레알과 베탕쿠르였다. 하지만 딸과의 재산 분쟁, 탈세, 불법 정치자금 전달 의혹으로 베탕쿠르는 '로레알 왕국의 고고한 여왕' 이미지에 씻을 수 없는 얼룩을 남기게 됐다.
다음주에는 '인도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아짐 프렘지 위프로(Wipro) 회장을 소개합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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