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 강원에서 수업 중일 때 한 학인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운문사는 썩었습니다!”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당황할 때, 스님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맞아요. 운문사는 썩었어요. 그렇지만 앉아요. 지금은 수업시간이니까.” 스승에 맞서기 위해 맹렬한 용기를 냈을 그 학인은 맥없이 자리에 앉았고 수업은 아무 일 없는 듯 진행됐다.
한국 비구니 스님들의 큰 스승인 명성(明星ㆍ80) 스님의 일화다. 비구니 교육 기관이 변변찮았던 1970년대 그는 동국대 교수직도 마다하고 경북 청도 운문사로 내려가,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을 길러내며 그들의 고충과 투정을 어르고 감싸고 때론 맹랑한 도전까지 품어 안았다.
당시 세속 교육은 쓸데없는 일로 여기고 참선만 중시하던 절집 분위기에서 영어와 일어 등 외국어에다 동서양철학, 사회학, 심리학 등도 가르치고 꽃꽃이, 요가, 서예에 손수 풍금까지 치며 노래를 가르치는 스님의 열린 교육은 파격을 넘은 충격이었다. “책 보면 큰일 나고, 음악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고, 공부한다 그러면 책망 받던” 때, 스님은 “남을 가르치려면 우선 자신부터 가르쳐야 한다”며 제자들의 공부를 독려했다. “운문사 출신 스님은 어딜 가나 시끄럽고 튄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런 개방적 분위기 때문. 학인들은 운문사 승가대 입학을 위해 재수까지 불사할 정도여서, ‘비구니 서울대’로 통했다고 한다.
가난했던 운문사는 그가 주석한 후 전각 40여 동의 대가람으로 성장했다. 그의 손길을 거쳐간 제자는 1,700여명, 지금도 250여명의 학인들이 구족계를 받기 위해 공부 중인 운문사 승가대는 국내 비구ㆍ비구니 사찰을 통틀어 최대 규모다.
명성 스님이 운문사에 주석한 지 올해로 40년. 이를 기념해 제자들이 그의 생애와 가르침을 담은 책 3권을 한꺼번에 출간하고 지난 27일 운문사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평전 와 법문집 , 각계 인사들이 스님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이상 불광출판사 발행)이다.
스님의 상좌인 서광 스님이 쓴 평전은 각종 자료와 주변 인물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명성 스님의 일대기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데, 스님의 다채로운 성품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이 흥미롭다. 별명부터 ‘밀리미터 스님’ ‘만년 소녀’ ‘인욕보살’ 등 무수하다. 스님은 지시 사항을 제대로 이행했는지 자를 들이대며 검사할 정도로 일에 있어선 철두철미하면서도, 더러는 ‘4차원적인’ 면모도 보였다.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드라마에 푹 빠져 “금순이가 결혼한다니 축하금을 보내겠다”고 하고(농담이 아니었다고 한다), 뱀이나 고양이에게도 깍듯이 존대하며 대화하는 모습에선 천진난만한 소녀의 감수성이 묻어난다.
무엇보다 제각각의 사연을 가진, 그것도 웬만한 각오 없이는 머리 깎지 않았을 성깔있는 제자들을 이끌면서도 언성을 높이거나 막말 한번 하는 걸 본 이들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잘 참는다’는 뜻으로 붙여진 별명이 ‘인욕(忍辱)보살’이다. “거울에 이렇게 내 얼굴을 비추면 보이다가도 거울을 치우면 아무것도 없잖아요. 선악이 다 그래요. 선도 없고 악도 없어요”(141쪽)라며 스스로 화를 삼키는 스님이었다. “당신 방에 제비가 집을 지어서 똥을 싸니까 ‘여기에 싸도록 해요’ 하며 신문을 깔아줬거든. 그런데 다른 데 싸는 거야. 그러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요? 우리 학인들 닮아서 말을 안 듣나요?’ 제비들 보고 이렇게 말을 하는 거야, 하하하!”(135쪽)라는 제자의 증언도 재미있다.
명성 스님의 부친은 현대 불교의 대강백이었던 관응(觀應ㆍ1910~2004) 스님이다. 어릴 때부터 부친 곁에서 수행자의 삶을 배웠던 그는 말하자면 ‘준비된’ 엘리트 스님이었다. “내가 이렇게 승려 노릇 하는 게 나쁘면 너한테 권하겠느냐”는 부친의 권유에 23세 초등학교 교사였던 딸은 두말없이 출가했다. 28세에 당대의 큰스님들을 모시고 조계사 법당에서 법문을 할 정도로 일찍부터 불가의 주목을 받았고, 그 기대대로 한국 불교 중흥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가톨릭 신자였다가 명성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한, 평전의 저자 서광 스님은 그런 면 때문에 외려 “스님처럼 살지 않겠다”고 늘 다짐했었다고 털어놨다. 완전한 자유를 갈구하던 그에겐 스승이 운문사라는 틀에 갇힌 부자유한 사람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스승의 평전을 준비하면서 그 진면목을 새삼 깨닫게 돼 후회와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는 저자의 고백도 인상적이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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