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친구를 따라 광희동에 갔다. 당시 광희동은 서울의 대표적 의류 상가였던 청계천 평화시장에 옷을 만들어 대주던 '제품공장'이 몰려 있던 곳으로, 친구 누나가 재단사인 남편과 가내공업 수준의 공장을 돌리고 있었다. 저녁 때가 되어 광희시장에 있던 자장면 집으로 향했다. 한창 먹성이 뻗치던 때라서 당연히 곱빼기를 주문했다가 본 적이 없는 엄청난 양에 놀라고, 고작 100원인 값에 다시 놀랐다. 학생 버스요금이 10원이던 당시 자장면은 170~200원이었으니 '진짜 곱빼기'가 100원이면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 동대문과 평화시장, 광희시장으로 이어진 일대는 옷감상과 제품공장, 의류상이 밀집했고, 관련 종사자들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들과 처지가 닮았던 인쇄공들이 주로 드나들던 을지로 인쇄골목 식당의 음식값도 쌌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알고 보니 옷감이나 완성된 옷을 지게로 나르던 지게꾼들이 즐겨 찾는 집이었다. 들어서는 손님들은 거의 모두 곱빼기를 주문했다. 솔직히 맛있지는 않았던 자장면 곱빼기를 후루룩 비우고 서둘러 자리를 뜨던 그들의, 중년에 벌써 주름이 패였던 얼굴이 흑백사진처럼 기억에 남았다.
■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네 번이나 흐른 지금의 서울에서 그때와 비슷한 장면을 만난다. 탑골공원 뒤쪽 낙원동이나 종묘시민공원 옆 골목에서는 2,000~3,000원에 칼국수나 시래기해장국, 순대국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여럿이다. 고객의 연령층은 광희시장 자장면 집보다는 20년쯤 높다. 혹독한 육체노동이 안긴 주름 대신 세월의 흐름과 함께 온 가난의 주름을 얼굴에 새긴 손님들이 적지 않다. 그나마 사먹을 수 있는 노인들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실제로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노인들의 줄이 늘 길다.
■ 2018년 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사회적 논의의 발상과 지향점이 어딘가 이상하다. 생산가능인구(15~64세) 몇 명이 노인 한 명의 부양을 떠안아야 한다고 젊은 세대를 걱정한다. 앞만 보며 달려온 한국사회의 관성을 드러낼지언정 가난과 건강불안이 핵심인 노인문제 해소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오래 전에 고령사회에 접어든 선진국의 노인과 젊은이 모두 우리보다 행복하다. 또 사회가 재화나 가치의 교환체계라면 과거의 기여에 대한 보상이 미래의 기여를 겨냥한 투자보다 앞서 마땅하다. 젊은 세대의 고생이 심한들 현재의 노인들이 겪은 가혹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릴 일이야 있을까.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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