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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피겔 '獨통일 20주년' 맞아 비화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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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피겔 '獨통일 20주년' 맞아 비화 공개

입력
2010.09.30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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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은 물론, 미국과 소련 등 주요 열강조차도 베를린 장벽 붕괴가 곧바로 독일 통일로 연결될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최소 1995년까지는 동서독이 통일돼서는 안 되며 그 이후가 적합하다는 여론도 비등했다. 그러나 동서독 대표를 비롯해 미, 영, 프, 소 4개국 대표는 이듬해 10월 3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옥토베르 호텔에서 독일 통일에 합의했다. 영구적 분단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동서독 분리는 장벽이 붕괴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하나가 된 것이다.

당시 대다수 서유럽국가는 독일 제국주의 부활을 두려워하고 통독에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이유로 통독을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적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은 30일 독일 통일 협상을 두고 서독 정치인들과 세계 열강 정치인들의 숨막혔던 막후 협상과정을 담은 비화를 공개했다. 슈피겔은 최근 독일 외교부가 공개한 통독과정을 담은 수천장의 문서 등을 입수해 보도하면서 “장벽 붕괴 이후 300일 동안 동서독은 미친듯한 변화를 겪었다”고 평가했다.

문서에 따르면 통독의 첫발은 장벽이 무너지고 2주가 채 안 된 1989년 11월 21일 시작됐다. 니콜라이 포르투갈로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독일문제 담당고문이 서독을 방문, 호르스트 델칙 서독 총리 안보보좌관에 7장짜리 문서를 전달하면서다. 이 문서에는 서독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에서 탈퇴해 모든 서방의 핵무기가 독일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여기에는 장벽 붕괴 이후에도 나토를 독일에서 몰아내고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었다. 하지만 델칙은 이를 소련 수뇌부가 독일의 통일을 생각한 것으로 곡해했다.

선거가 1년 넘게 남았지만 기민당에 대한 지지율 하락으로 고심하던 콜 총리에게도 통일 노선은 돌파구가 됐다. 이런 분위기가 전해지자 국제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마가릿 대처 영국 수상과 프랑소와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비밀리에 만나 독일 통일 반대 의견을 재확인했다. 미국은 나토라는 울타리 안에서 독일이 통일된다면 승낙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소련이 인정할 리 없다는 계산이었지만 콜 총리는 이를 덜컥 받아들였다.

동독의 불안정한 상황은 콜 총리에게 큰 카드로 작용했다. 한스-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무장관은 동독이 대혼란에 빠질 것이며 이를 방어하기 위한 해독제는 통일이라고 동맹국들을 설득했다. 그러자 미국이 먼저 움직였다. 당시 서독 국민 80% 이상이 서독의 나토 회원국 유지에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스카 라폰타인이라는 반 나토 노선을 표방한 서독 정치인이 차기 총리로 유력하다는 분석이 나오자 유럽에서 미군을 철수할 수 없던 미국이 나토 안에서의 통일을 약속한 콜 총리를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입장이 돌아서자 영국과 프랑스는 동서독의 통일을 막기 위해서는 무력 사용밖에 없다는 입장엔 동의했으나 어느 쪽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려 하지 않았고, 하나 둘씩 독일 통일 논의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독일 통일이라는 공은 고르바초프에게 넘어갔으나 소련 상황도 녹록지 않은 상태였다. 리투아니아, 아제르바이잔 등에서 분리 독립 운동이 일어난데다 내부적으로는 강경파들의 압박을 받았고 경제는 끝없이 추락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독일의 길은 독일 사람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콜 총리의 말에 “내가 뭘 할 수 있겠나”고 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통일 협상 과정에서도 독일이 나토 울타리 안에서 통일한다는 것에 지속적으로 반대한 소련은 1990년 급속도로 무너진 경제에 발목이 잡혔고 수백억마르크에 이르는 차관을 서독으로부터 받은 뒤 독일 통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슈피겔은 “독일 통일 과정은 드라마틱한 줄다리기의 결과였다”며 “결국 ‘국가간에는 영원한 친구는 없으며, 영원한 이해관계만 있다’는 19세기 영국 총리 팔머스톤의 말을 상기시킨다”고 평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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