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장수(長壽)왕조다. 동일 가계(家系)의 군주들로 500년 이상 이어진 왕조는 어디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런데 태조에서 마지막 순종까지 27명의 왕이 통치한 그 긴 조선왕조에서도 아들, 손자로 내리 이어지는 조손(祖孫) 3대 왕권승계는 예외적이다. 16대 인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5대 승계가 유일한 사례다. 후사가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권력암투나 정변으로 인해 형제, 인척 등으로 갈지(之)자 형 승계가 이뤄진 게 보통이었다.
왕권 세습이 당연시되던 그 시대에도 쉽지 않았던 조손 3대의 권력 승계가 21세기 대명천지에 한반도 북쪽에서 시도되고 있다. 특수관계인 중국의 난감함을 제외하고 세계인의 반응은 경악과 조롱 일색이다. 좀 과장하면 희한한 전개를 즐기기까지 하는 분위기다.
파국적 선택을 한 김정일 정권
1994년 여름 북한주석 김일성 사망 직후 백두산에서 동해까지 두만강을 탐사하면서 숱한 북한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김정일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혁명의 정통성'도, '밥'을 해결해줄 능력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약한 정통성 때문에 인민을 달랠 성과가 필요한데, 밥 해결에 필요한 개방과 체제 유지는 상호 모순되므로 어떤 선택이든 파국이 불가피하다는 설명이었다.
알다시피 이 예상은 틀렸다. 김정일은 개방 대신 더욱 가혹한 통제와 대중동원, 긴장감 조성으로 인민의 불만표출을 원천봉쇄하는 방식을 택했다. 지금도 북한 정권이 안고 있는 딜레마의 기본은 같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통제는 효과적이나 한시성을 갖는다. 당연한 반작용인 내부압력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와 달리 중국, 한국의 발전상 등 외부세계 정보가 알음알음 퍼져 있는 상황이다. 올 들어 이례적으로 거듭된 김정일의 중국 방문도 이런 고민의 반영이다. 아마도 그는 김정은이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김정은에겐 모래로 쌀을 만들고, 호풍환우(呼風喚雨)까지 했다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신통력이 없다. 겨우 20대 후반에 돌연 공식 후계자가 되고, 아버지의 건강 악화설이 끊임없이 나도는 상황의 그에게 신통력을 '연마'할 시간은 없었다. 김정일만 해도 20대 후반에 당직을 맡기 시작, 38세 때인 1980년 공식 후계자로 지명된 뒤 아버지와 사실상 공동정부를 운영했다. 참담한 현실을 포장해줄 최소한의 개인적 카리스마조차 김정은에겐 미처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확실히 김정일 정권은 파국으로 가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북한에서 진행 중인 최고의 리얼리티 쇼(미 국무부)'를 남들이 비웃고 즐긴다고 해서 우리도 함께 그럴 수는 없다. 우리에겐 도리어 정신이 번쩍 드는 무섭고도 급박한 상황이다. 북한 내부상황 급변으로 인한 역사의 대전환이 벼락처럼 닥쳐들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 것이다. 정황으로 보아 짧으면 2~3년 내일 수도 있다. 북한의 급변상황은 크게는 기회지만, 당장은 우리의 국가위기다.
돌발상황 대비할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에게 이를 감당할 만한 준비가 돼 있느냐는 점이다. 국제적ㆍ외교적으로 주변 이해가 걸린 국가들을 설득, 우리가 상황을 주도해나갈 수 있는가. 정치적ㆍ사회적으로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차분하게 우리 내부를 통제할 수 있는가. 경제적으로는 감당할 준비가 돼 있는가. 군사적으로 우리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가. 국가적으로 총력을 기울여 점검하고 급히 보완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또 그에 앞서 아웅산 테러나 KAL858편기 폭파사건처럼 북한정권 이양기의 도발 가능성은 또 어쩔 것인가.
더 이상 통일 방식이나 경제적 득실 따위를 따져가며 한가하게 먼 일 보듯 할 때가 아니다. 치밀한 국가적 마스터플랜을 만들고 구체적 실행을 준비해야 한다. 북한 스스로 최후의 선택을 한 상황이다. 정말 이제는 시간이 별로 없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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