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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구월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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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구월의 끝

입력
2010.09.29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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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변 포도밭에 청포도가 끝물입니다. 긴 그림자를 남기며 서늘해지는 북쪽으로 돌아서는 구월도 오늘로 끝입니다. 다다음 달에 시집을 간다는 포도밭 아가씨는 수줍은 미소를 감추지 못해 얼굴이 고추잠자리처럼 붉어집니다.

목이 말라 물 한 잔을 청하는 저에게 청포도 한 송이를 씻어 건네는데, 뜨거웠던 지난 시간이 청포도 알알이 아이스와인처럼 빚어놓은 달콤함이 입 안 가득 넘칩니다. 저 아가씨에게 청포도가 익어갈 때 한 번 다녀가겠다는 약속을 했었습니다.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이후 칠레산(産) 청포도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대형 마트에서 사시사철 수입 청포도를 흔하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청포도밭에서 청포도가 익어가는 풍경은 만나기가 어려워져버렸습니다. 청포도 아래서 휘파람을 불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도 함께 사라져 안타까웠는데, 경남 함안군 칠북면 이령마을에서 청포도 농사를 짓는다는 저 아가씨에게 직접 전해 들었습니다.

청포도가 맺히기 시작했다고, 청포도가 익어간다고 계절의 마디마디 '청포도 안부'가 전해져 왔지만 저는 번번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손님'이 되었습니다. 오늘 현지의 청포도 시세는 4㎏ 한 상자에 1만1,000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그리워한 만큼의 값보다는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지만, 오래 망설이다 당신에게 청포도 한 상자를 보냅니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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