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컨트롤타워 확립과 정부출연연구기관 개편 등 연구개발(R&D) 지배구조(거버넌스) 변화가 본격 추진의 궤도에 올랐다.
연구자들이 실험을 제쳐놓고 R&D 예산을 편성, 조정, 배분하는 기획재정부로 찾아가 연구비를 따기 위해 '줄 서기'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 미래 성장동력을 창출하는 과학기술 분야의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변화를 둘러싼 진통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R&D 예산권 조정을 둘러싼 정부 부처 간 입장 차가 미묘하다. 출연연 개편을 둘러싸고 정체성 상실이나 구조조정을 우려하는 연구원들의 반발도 일리 있다. 변화의 청사진이 어디까지 그려졌는지 현주소를 점검한다.
국과위, 상설 행정위원회로 격상
1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본회의에는 국과위를 국가 R&D 컨트롤타워 역할을 담당하는 독립적인 상설 행정위원회로 격상시킨다는 정부의 계획안이 상정될 예정이다. 격상된 국과위의 사무국 인원은 미정이나 민·관 전문가를 포함해 총 150여 명일 거라는 추측이 나온다. 위원장도 별도로 장관급 인사가 맡게 된다. 교육과학기술부 소속 비상설기구로 교과부의 1개 국이 사무국 업무를 병행하는 현행 국과위에 비해 위상이 크게 강화되는 것이다.
이번 계획안의 핵심은 국과위가 R&D 예산을 배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한다는 점이다. 계획안에 따르면 교과부나 지식경제부 같은 R&D 관련 부처나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이 필요한 예산을 국과위에 요청하게 된다. 국과위는 이를 국가 전체 R&D 방향에 맞게 배분하고 금액을 조정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 일을 기획재정부가 한다. 앞으로 기재부에는 국과위가 배분, 조정한 예산을 국가 전체 예산과 함께 편성하는 기능만 남게 된다.
문제는 국과위가 예산을 배분, 조정할 수 있는 R&D의 범위(비율)를 어디까지로 잡느냐다. 기재부는 되도록 적게 내주려고, 국과위는 많이 가져오려고 한다. 이주호 교과부 장관은 29일 기자간담회에서 "(배분·조정권을) 최대한 많이 가져올 수 있는 방향으로 협의 중"이라고만 밝혔다.
현재 국과위 역할은 정책 심의와 예산 배분 자문에 국한돼 있다. 국과위가 과학계 의견을 수렴해 정책에 반영하고 컨트롤타워로서 기능을 발휘하려면 예산 배분과 조정, 평가기능이라는 '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많았다(본보 2월24일자 6면 참조). 기재부 예산담당자가 1, 2년마다 바뀌는 탓에 과학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과 중장기적 안목이 부족하다는 문제도 계속 제기돼왔다.
이에 이번 계획안에 대해 과학계는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박영훈(한국생명공학연구원장) 기초기술연구회 기관장협의회장은 "국과위에 예산권을 부여한 건 R&D 최상위 거버넌스인 컨트롤타워를 정립했다는 의미"라며 반겼다.
일각에선 국과위 강화가 옛 과학기술부의 부활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에 대해 이 장관은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격상된 국과위는 참여정부 때 과학기술부 아래에 있던 100여명 규모의 과학기술혁신본부와 비슷하다. 당시 혁신본부 기능은 과학기술정책 조정과 평가, R&D 예산조정의 세 가지였다. 국과위는 앞으로 이 세 가지 기능을 모두 수행하게 된다. 교과부와 지경부 등 부처에는 과학기술정책 기획 기능이 남는다.
이번 계획안이 1일 의결되면 과학기술기본법을 개정하고 행정위원회 설치에 관한 새로운 법을 제정해야 한다. 이들 법이 연말까지 국회를 통과해야 예산 확보가 가능하다. 시간은 많지 않다.
국과위 정립 먼저, 출연연은 그 다음
출연연 개편을 둘러싸고 현재 두 가지 안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교과부 고위 관계자는 "현재 구조 그대로 운영하되 출연연들의 소속만 국과위 아래로 바꾸자는 안과 관련 부처 직속으로 변경하자는 안이 있다"며 "어느 쪽으로 결정될지 전혀 예측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당초 26개 출연연을 일부 통합해 국과위 아래 단일법인으로 만드는 방안도 나왔으나 이는 출연연 일선 연구원들의 반발로 거의 무산됐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재 출연연은 교과부 기초기술연구회와, 지경부 산업기술연구회에 각각 13개씩 소속돼 있다. 나뉘어 있다 보니 협동연구나 인력교류가 쉽지 않다. '칸막이식' R&D로 중복투자 우려가 크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연구 성격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구조 개편에 대한 출연연의 입장은 제각각이다. 김명수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은 "기관 간 벽 없이 협력하면서 현재 각 기관의 정체성과 실적, 브랜드가치를 유지하는 큰 틀의 개편 방향에는 기관장들 대부분 동의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금으로선 국과위의 위상과 역할이 확정되고 나야 출연연 구조개편 논의가 본격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 교과위 박영?한나라당 의원은 "새로 임명될 국과위 위원장이 책임을 갖고 개편해야 한다는 게 교과위의 중론"이라고 전했다.
교과부는 출연연 구조라는 하드웨어 개편이 어렵다면 연구원 정년 연장이나 인건비 지원 확대 같은 소프트웨어부터 개선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예를 들면 외환위기 때 65세에서 61세로 단축된 출연연 연구원의 정년을 62세로 변경하고 업적에 따라 연구위원 등 다른 직함을 줘 실질적으로 더 연구를 할 수 있게 하는 방법 등이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 외국은 어떻게/ R&D 종합조정기구서 관련업무 전담
우리나라는 1999년부터 대통령 직속으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두고 국가 연구개발 예산을 심의하는 과학기술행정체계를 유지해왔다. 국과위 권한이 가장 컸던 시기는 2004∼2007년. 사무국이 과학기술부 아래 과학기술혁신본부에 소속돼 있으면서 R&D 예산을 실질적으로 조정·배분했다. 그 전후에는 정책 방향을 제시하거나 자문하는 역할에 그쳤다.
미국과 일본 역시 우리나라 국과위에 해당하는 R&D 종합조정기구를 두고 있다. 모두 장관급 인사가 사무국을 이끌고 있으며, 수십 명의 인원이 관련 업무를 전담한다는 점이 우리와 다르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선진 각국의 종합조정기구는 실제로 국가 전체 R&D의 컨트롤타워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미국의 종합조정기구는 현재 우리나라처럼 비상설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여기서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과 긴밀한 협의를 거치면 이를 토대로 대통령 직속 관리예산처(OMB)가 R&D 예산을 조정, 배분한다. 일본은 R&D 종합조정기구로 상설 종합과학기술회의를 운영한다. 여기서 예산 편성에 대한 의견과 우선순위를 제시하면 이를 반영해 재무성에서 실제 예산을 편성하는 체계다.
임소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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