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만 개의 호수와 산타클로스의 나라.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핀란드는 녹색과 회백색의 물결이었다. 지평선에 가까워질수록 그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끝없는 자작나무 숲, 하늘을 향해 곧고 길게 뻗은 나무들은 정직한 핀란드 사람들을 닮았다.
"헬싱키의 랜드마크요? 음…." 핀란드에서 15년 동안 아트디렉터로 일해왔다는 한국 출신의 디자이너 안애경씨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없어요"라고 답했다. 핀란드에는 어느 동네, 어느 거리 할 것 없이 멋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란다. 안씨의 말처럼 살아보면 특별히 뽐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쓴 디자인에 감탄하게 된다는 도시, 2012년 세계디자인수도(WDC)로 선정된 헬싱키는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산실이다.
시장, 도서관에 스며있는 모더니즘
항구도시인 헬싱키의 부둣가에서는 매일 일종의 벼룩시장인 항구 마켓이 열린다. 관광명소로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에는, 핀란드 대통령도 이따금 점심시간에 산책을 나온다.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 대통령 관저가 있다. 울타리도 없이 경비원 1명이 입구를 지키고 선 관저 앞, 유모차를 끌고 가는 임산부와 애완견 동호회원들의 발걸음에는 조금도 어색함이 없다.
페까 티모넨 'WDC 2012 헬싱키' 총감독은 "핀란드의 디자인은 전통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면서 "공공 시설, 대중교통 수단 등 공적인 영역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디자인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핀란드의 지하철과 새로 도입된 전동차가 현대 모더니즘 디자인의 대가로 꼽히는 안띠 누르메스니에미와 알토대 학생들의 공동 작품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관광명소는 대개 짙은 상업성 탓에 현지인들이 오히려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항구 마켓을 비롯한 헬싱키의 관광지는 핀란드 사람들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일상의 현장이다.
핀란드에서 손꼽히는 현대건축물인 템?y리아우키오 교회도 그렇다. 일요일이었던 지난 12일 오후 2시. 예배가 시작하자 교회 문은 굳게 잠겼다. 평일 같으면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사진도 마음껏 찍도록 내버려뒀을 시간이지만 예배가 열리는 일요일만큼은 다르다. 평일 저녁에 시민들을 위한 음악회를 여는 예배당에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와 성가대의 찬송이 돌로 쌓은 벽과 자연광을 들이는 유리 천장을 타고 흘렀다. 관광객들은 예배가 끝날 때까지 교회 밖 암석 위에 소박하게 올려놓은 구릿빛 십자가만 바라봐야 했다.
헬싱키가 WDC로 선정되면서 슬로건으로 내건 '디자인을 일상 속으로'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은 도서관이다. 한국 행정단위로 동에 해당하는 '똘로'의 도서관 입구에는 '차별 없는 구역'이라고 쓴 파란색 스티커가 붙어 있다. 헬싱키 도서관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압축하는 글귀다. 정기간행물실에서는 머리 희끗한 어르신들이 신문을 읽고 있고, 아이들은 놀이터처럼 꾸며놓은 열람실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거나 장난감을 갖고 논다. 이들에게 도서관은 침묵이 아닌 오락의 공간이다.
핀란드 사람들은 지식에 접근하는 데 누구도 한계가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헬싱키에는 시민 1만 4,000명 당 1개 꼴로 시립도서관이 있다. 인구 24만명 당 1개의 공립도서관이 있는 서울과 대비된다. 접근성도 좋아 붐비는 기차역 앞이나 대형 쇼핑몰 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는 어디에나 도서관이 있다.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의 힘
핀란드는 12세기 중엽부터 650여년 동안 스웨덴의 식민지였고, 이후 1917년까지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옛것을 존중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핀란드의 문화는 아마 어렵게 되찾은 자주적 역사를 아로새기려는 노력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도시계획도 마찬가지다. 헬싱키 시는 무려 100년을 내다보고 도시계획을 세워나간다. 도시계획의 마스터플랜을 재정비하는 데만 30년이 걸렸을 정도다. 계획이 서면 시 공무원과 건축가, 일반 시민들이 함께 모여 의견을 나누는 공청회가 지속적으로 열린다. 꽤나 지난한 과정이지만 더딘 대신 시행착오도 적다는 것이 시 관계자의 설명이다. 유씨 빠유넨 헬싱키 시장은 이 같은 과정에 대한 어떤 규정, 명칭이 있느냐고 묻자, 망설이다가 "'Dialog System'이랄까요?"라고 답했다.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이 체화된 이들에게는 아마 질문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헬싱키의 노년층 주거지역으로 기획된 '아라비아란타'(아라비아 해안이라는 뜻)는 그 과정을 잘 보여주는 현장이다. 바닷가 인근이라는 입지와 현대적인 고층 건물, 개성 있는 공공 설치미술작품 등으로 이미 1만여명의 주민이 입주했고 선호도 또한 높아지고 있는 이곳은, 1990년 이전만 해도 핀란드의 산업화 초기의 건물들로 낙후된 공업지역이었다.
주민과 디자이너, 학생들이 함께 공간을 디자인하는 '헬싱키 리빙 랩(Helsinki living lab)' 프로젝트가 이곳의 상전벽해를 이끌었다. 현재 이곳에 놓여진 설치미술작품의 상당수는 알토대 학생들의 작품이다. 아라비아란타를 조성하는 데 참여한 노인들은 다른 지역 주민들에게 그 과정을 알려주고 가르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중심가에 위치한 전시공간 '라이투리'도 시민들의 디자인 참여를 유도하는 거점이다. 5년 전 폐쇄된 시외버스터미널의 내부를 개조해 만든 이곳은 헬싱키 시의 도시계획을 구획 별로 보여준다. 세미나룸에서는 헬싱키의 증가하는 인구, 이민자, 환경 문제 등 도시문제 전반에 대한 토론이 열리기도 한다. 대학은 물론 부동산 중개업자와도 연계해 공모전, 전시회를 개최한다.
페까 티모넨 총감독은 "미래의 도시 개발은 완제품을 내놓고 투표하는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과정을 열어놓고 시민의 의견과 감정을 반영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디자인은 항상 인간중심적이고 창의적이죠. 딜레마처럼 느껴지는 독창성과 보편성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메커니즘이 바로 디자인입니다." 시민 누구나 자신의 생활터전을 '디자인'할 수 있는 곳, 화려한 건축물이 없어도 헬싱키에 디자인 전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헬싱키= 글ㆍ사진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 휘보넨 알토대 예술디자인대학장
핀란드 디자인을 말할 때 빼놓아선 안될 인물이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였던 알바르 알토(1989~1976). 호수에서 착안한 곡선 모양의 꽃병 디자인으로 유명한 그는 평생 '인간 중심의 디자인'을 주창했다.
결핵요양원을 지으면서 호흡이 어려운 환자를 위해 금속 재질은 물론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구부려서 만든 '파이미오 체어'는 그의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적 디자인다.
올해 초 헬싱키에는 그의 이름을 딴 국립대가 생겼다. 유럽 굴지의 디자인 명문학교로 꼽히던 헬싱키예술디자인대학과 헬싱키 경제대학, 헬싱키공과대학을 합친 알도대학이 출범한 것이다. 지난 13일 만난 헬레나 휘보넨(60) 알토대 예술디자인대학장은 "알바르 알토의 '사람에서 사람으로'라는 철학이 곧 학교의 비전"이라며 "그는 핀란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휘보넨 학장은 "알토의 글과 디자인에서 드러나는 학제간 융합 또한 학교가 지향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제가 공부하던 1970년대만 하더라도 디자인 교육은 트렌드, 방법론에 대한 탐구가 중심이었어요. 하지만 분명히 한계가 있었죠. 미래의 디자이너는 사회와의 의사소통, 분석적 사고가 중요해요."
그에 따르면 예술디자인대학은 199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학문과 연계한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연구사업에 전폭적 지원을 했다. 정책과 산업에 디자인을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이때부터 확산됐다. 알토대 학생들의 졸업작품이 아라비아란타 거리를 장식하고 유명 브랜드 매장에서 팔리게 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디자인은 서로 다른 분야를 조정하는 힘이 있어요. 우리는 결과물보다 열린 마음, 평생교육의 필요성 같은 덕목을 중시하죠" 그는 "무엇을 위해 디자인을 하는가'라는 철학강의도 이를 겨냥한 수업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휘보넨 학장은 헬싱키 도시 디자인의 특징을 "평등하고 아름다우며 기능적인 것"이라고 요약했다. "이제 디자이너들의 과제는 멋진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시민들과의 충분한 소통으로 공공성을 더해야 한다는 겁니다. 알바르 알토처럼요."
김혜경 기자
■ 인터뷰/ 유씨 빠유넨 헬싱키 시장
세계 46개 도시와 경합한 끝에 2012년 세계디자인수도(WDC)로 선정된 헬싱키. 지난 13일 만난 유씨 빠유넨(56) 헬싱키 시장은 "헬싱키에는 디자인의 전통이 있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와 건축가가 많으며, 미래를 향해 변화를 추진하고 있는 점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WDC는 국제디자인연맹(IDA)이 2008년부터 디자인을 통해 시민의 삶의 질을 개선한 도시를 선발해오고 있는 프로젝트. 2년마다 지원 경쟁 방식을 거치는데, 첫 해에는 이탈리아 토리노, 2010년에는 대한민국 서울이 선정됐다. 서울시가 짓고 있는 디자인플라자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올해 초 31개 도시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국제컨퍼런스 등이 WDC 사업의 일환이었다.
빠유넨 시장은 "디자인 하면 흔히 상품 디자인을 떠올리기 쉽지만 우리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교육, 의료 같은 복지 디자인"이라며 "2012 WDC는 헬싱키가 향후 20년 동안 크게 변화하는 과정에 놓인 국제적 이벤트"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2월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헬싱키와 닮은 점이 많았다. 외적으로는 물과 녹지를 활용하고 있고, 내적으로는 산업과 디자인의 연계가 활발하다는 점이 그렇다"고 그는 서울에 대한 소감을 말했다.
현재 헬싱키는 바닷가 인근에 거주지역을 개발하고 도심에 거점을 만들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인구 밀집 지역인 파실라에 한해 고층건물 제한 규정을 풀고, 지하철 노선 확장 등 대중교통을 정비하고 있다. 빠유넨 시장은 "한꺼번에 새 것을 만들려 하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가진다는 기존의 철학은 동일하다"고 강조했다.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세대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헬싱키가 옛 것을 활용해 새 것을 만드는 이유이지요."
헬싱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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