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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4> '그래 내 스커트 벗어서 보여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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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4> '그래 내 스커트 벗어서 보여 주마'

입력
2010.09.2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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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이 좀 묘한 것 같다. 신문에 실릴 글의 제목으로는 아무래도 쌍스러운 것 같다. 여성이 스커트를 벗다니! 그것도 남들 보는 앞에서! 어디서 난데없이 무슨 누드 쇼라도 벌이자는 걸까? 아니면 정신 헛 돌아간 여편네가 남 보기 민망한 짓거리를 하자고 날뛰고 있는 걸까? 아리송하다. 아니 흉측하고 망측하다 한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제법이 아니라 아주 진지한 어느 현장에서 웬 여성이, 남들 들으라고 소리쳐서 내뱉은 말이다.

그 여성은 초등학교 교사고 상대는 학생들이었다면 아무도 믿으려 들 것 같지 않다. 그나마 중년 넘긴 여선생님이 잘못을 저지른 학생을 두고는 정식으로 야단치고 타이르고 하는 현장, 정식으로 교육적이어야 할 현장에서 그랬었다면, 누구나 무슨 일인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말이다. 진짜다. 그러니까, 까마득한 그 옛날도 또 옛날,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실제로 당한 일이다. 멀쩡히 대낮에 학교 운동장에서 겪은 일이다. 어릴 적 꼬맹이로 겪은 일, 60 년도 더 넘은 까마득한 옛적 일이지만 지금도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한, 멀쩡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누구나 여전히 믿을 것 같지 않다. 여 선생이 스커트 벗어서 맨 살 엉덩이를 남학생들에게 보여주마고 소리쳤다고 하면 아무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어디 난데없는 미친 짓거리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부산 공립 부민 국민학교'라고 했다. 부산의 서부지역을 대표하는 남부러울 것 없는 당당한 학교였다.

그런데도 어느 날, 난데없이 거짓말 같은 일, 누구나 질겁할 일,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여학생 반의 담임인, 일본인 여성 교사가 남자반의 우리들을 방과 후에 느닷없이 운동장으로 불러내었다. 우리는 비상소집을 당했다. 중 늙은 그 여선생은 머리카락을 치켜세우면서 노발대발 했다. 심하게, 호되게 욱대기는 통에 우리는 미처 영문도 모른 채, 모두 겁에 질려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까부터 우리 앞에 죽는 시늉으로 서 있던 우리 반 아이 하나를 욱대겨서는 꿇어앉게 했다.

"이 녀석이 범인이야. 나머지 너희 놈들은 공범이고."

그렇게 소리, 소리 질러댔다.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했다. 저 녀석이 범인이란 것은 뭐고 우리가 공범이란 건 또 뭔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뚱딴지 같았다.

"내가 곡절을 일러 줄게, 잘 들어!"

끓어 앉은 녀석의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여선생은 앙칼지게 입을 열었다.

"이 못 된 녀석이 말이야, 여학생들 변소엘 남몰래 숨어들어 갔어. 천장 밑의 도리를 타고는 여학생들 소변보는 모양을 내려다보면서 말이야. 흉측한 녀석!"

그러면서 여선생은 무서운 말투로다가 악마와도 같은 소리를 질렀다.

"빨강 망토 입혀 주랴, 파랑 망토 입혀 주랴? 그 왜 너희들 다 알지 않아. 빨강을 택한 사람은 빨갛게 타서 죽게 하고 파랑을 고르면 파랗게 얼어 죽게 한다는 그 귀신의 소리를 이 고약한 녀석이 낸 거지. 여학생들은 겁에 질려서는 미처 소변을 제대로 누기도 전에 변소 칸에서 도망쳐 나왔지 뭐냐. 정말 나쁜 자식이야!"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더 그 가짜 귀신의 머리통을 호되게 쥐어박았다. 그 때서야 우리 공범 아닌 공범들은 겨우 영문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노기 충천하는 여선생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이 고약한 녀석이 그 짓을 한 데는 다르게 노리는 바가 있었어. 그게 뭔지 알겠나? 이놈들아!"

우리가 그걸 알 턱이 없었다. 모두들 거듭 어리둥절했다.

"그건 말이야, 딴 게 아니야. 이 녀석이 그런 귀신 흉내 내면서 사실은 여학생들, 맨살의 엉덩이가 보고 싶었던 거야. 음흉한 자식!"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더 그 가짜 귀신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고함을 쳤다.

"나머지 너희 놈들도 다를 것 없어. 여자들의 맨살의 엉덩이가 보고 싶겠지. 안 그러냐?"

그때서야 우리 모두가 터무니없이, 공범으로 몰린 까닭을 겨우 알아차렸다.

"보고 싶은 놈 손들어. 내가 내 엉덩이 보여줄 테니."

그러면서 여선생은 스커트 자락을 훌쩍! 걷어 올리는 게 아닌가! 허벅지 속살이 허옇게 드러나 보였다. 우리는 눈을 돌렸다. 그건 예상도, 상상도 못할 짓거리였다. 명색이 여선생님이 남학생들 앞에서 그게 뭣 하는 짓거리람?

"돌았어!"

나는 소리를 낮추어서 중얼댔다.

"그래 정말이야 미쳤어!"

옆에서 친구가 나직하게 맞장구를 쳤다.

우리 둘은 얼굴 마주 보면서 '쉿!' 집게손가락을 입에다 댔다.

이야기를 길게 풀어 놓았지만, 독자들이 믿어 줄 것 같지 않다. 황당무계(荒唐無稽)한 헛소리로 치부할 것 같다. 하지만 이건 한 치의 거짓도 과장도 없는 사실이고 진실이다.

한데 그 미완의 누드 쇼는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에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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