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선생은 조선적 주자학을 정착시킨 대유이다. 그는 도를 밝히고 덕을 쌓는 데 일생을 바쳤다. 퇴계가 글을 읽기 시작한 것은 6세부터였다.
처음에는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을 배웠다. 아침이면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그 노인 집으로 가서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것을 두어 번 외운 다음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마치 엄한 스승을 대하듯 노인 앞에 공손히 부복해 가르침을 받았다.
12세에 형 이해(李瀣)와 함께 숙부 송재(松齋) 이우(李堣)에게 를 배웠다. 퇴계는 1권을 마치면 1권을 외우고, 2권을 마치면 2권을 다 외웠다.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하자 3-4권을 읽을 때는 간혹 통쾌하게 깨닫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20세 되던 1520년(중종 15)에는 을 너무 독실히 읽다가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걸려 평생토록 고생했다. 다음 해에 진사 허찬(許瓚)의 딸인 김해 허씨에게 장가를 갔는데, 처가가 영주 부자였으나 처가살이를 하지 않았다.
1534년(중종 29) 3월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는데 어머니 춘천 박씨는 "문예에만 힘쓰지 말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현감 이상은 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고 했다. 훌륭한 어머니였다. 다른 사람 같으면 승승장구하라고 빌었을 텐데 자제하고 겸손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인지 퇴계는 늘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퇴계는 1544년(중종 39) 중종의 명으로 을 교열할 때 "이 책을 읽으면 가슴이 시원해진다"고 하면서 독실히 탐독해 득력한 바가 많았다고 술회했다.
퇴계는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거두어 정돈하고 머리 빗고 옷과 관을 가지런히 갖추어 입고는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었다. 때로 조용히 앉아서 사색에 잠길 때는 그 자세가 마치 석고상 같았지만 배우는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탁 트이도록 자세하게 설명해 아무런 의문이 남지 않도록 했다.
만약 누군가 묻지 않아야 할 것을 묻거나 말하지 않아야 마땅한 말을 하면 반드시 얼굴빛을 바르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힘든 듯 하지만, 학문을 논할 때는 시원스럽고 막힘이 없어서 의문 나는 것이 없었다. 몸은 마치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했으나, 일을 처리하는 데는 흔들림이 없었다.
퇴계는 본성을 잘 지키며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공부에 힘썼다. 특히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더욱 엄격했다(신독ㆍ愼獨). 때로는 새벽에 일어나 해가 뜰 때까지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서 스스로의 가다듬었고 활인심방(活人心方)으로 신체를 단련했다.
퇴계는 이익도 온 나라의 이익과 관계가 있는 도의에 맞는 경우에는 취해도 되지만, 이와 반하는 경우에는 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로지 고매한 지식에 대한 견해와 남보다 뛰어난 재주만을 믿고서 한결같이 실속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을 경계했다. 남의 말을 한마디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선현들의 견해도 자기의 생각과 다르면 비평하는 태도를 우려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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