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언급한 대로 1989년 들어 민중투쟁이 격화됐는데, 이것은 노태우정권이 민주화조치를 취하지 않은 데 따른 것이어서 전민련을 비롯한 민중운동진영은 중간평가를 통해 노태우정권을 퇴진시키기 위해 노태우정권 불신임투쟁에 돌입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문익환목사의 방북사건이 터졌다.
문목사가 평양에 도착한 건 3월 25일경이었으나 전민련이 문목사의 방북사건을 안 것은 3월 18일이었다. 문목사는 전민련 고문이어서 방북직전 이부영의장을 통해 방북의사를 전민련에 전했다. 전민련은 곧바로 주요간부회의를 소집해서 문목사 방북에 따른 대책을 논의했는데, 이미 문목사가 방북을 위해 출국한 뒤라 방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간부들은 문목사의 방북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으나 문목사의 통일 열정으로 보아 그 동기가 순수하고 또 원칙적으로 남북한 사이의 민간교류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아 문목사의 방북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다만 문목사의 방북사건이 중간평가문제를 실종시킬 염려가 있고, 또 공안탄압을 불러올 가능성이 커 운동의 발전에 역기능할 거라고 판단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그 해 1월초 나는 석방 인사차 문목사를 찾아 뵈었는데, 문목사는 최근에 썼다며 '꿈을 비는 마음', '걸어서라도 갈 테야' 등 북한에 가겠다는 뜻의 시를 몇 편 읽어주었다. 북한에 가실 거냐고 물었더니 그러고 싶은 마음을 시로 써 본 것이라고만 말했다. 이날 내가 '북한의 김일성은 남한의 민중운동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문목사는 '내가 잘 아는 일본에 있는 목사가 김일성을 만났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던데 왜 그럴까'라고 물었다.
나는 '남한의 민중운동세력이 크게 성장해서 남한에 민주정부가 수립되면 남북한 정치체제 비교에서 북한이 열세에 놓일 것이고, 또 남한 민중운동세력이 크게 성장하면 남한 운동권내의 북한추종세력이 북한추종을 중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런가'라고 하셨다.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혹 문목사가 방북할 뜻을 갖고 있다면 단념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문목사는 나의 이런 말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때 이미 방북을 결심하고 있은 터에 내가 반대할 것 같으니까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튼 문목사의 방북사건 후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지면서 이른바 공안정국이 도래했다. 경찰이 전민련의 주요간부들을 검거하려고 해 다들 사무실에 출근하거나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피신했다. 그래서 회의는 음식점이나 다방 같은 데서 했고, 특히 부천에 있는 원혜영의 집에서 많이 했다.
그런데 문익환목사의 방북사건이 공안정국의 빌미가 되긴 했으나 이 사건이 없더라도 노태우정권과 민중운동진영의 한판 대결은 불가피했다.
광주학살과 5공비리 문제는 물론이고 반민주악법의 개폐 문제도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어 민중투쟁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지하철노조와 현대중공업노조의 파업이 가장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밖에도 사회의 전 부문에서 민중투쟁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전민련의 주요 간부들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이었다.
그 당시 나는 대체로 지하철노조의 파업을 지원하는 일에 매달려 있었는데, 어느 날 현대중공업노조의 연설 요청이 있어 울산행 비행기표를 샀으나 지하철노조 파업문제로 갈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바빴다.
이런 와중에 전민련은 3월 19일의 '노태우정권 불신임투쟁 선포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중간평가투쟁에 들어갔는데, 3월 20일 노태우정권은 중간평가를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한동안 신임을 연계한 중간평가를 할 듯이 설치다가 갑자기 유보한다고 하니 많은 국민들이 당혹스러워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언론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비난했다.
그런데도 야당들은 일제히 이를 환영했는데, 이것은 이미 노태우정권과 내통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언론은 중간평가 유보를 '노태우와 김대중의 합작품'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영삼이 당총재인 민주당은 그 동안 중간평가의 실시를 전제해서 노태우정권 불신임투쟁을 전개했으면서도 노태우정권의 중간평가 유보를 민주당의 승리라고 주장하면서 환영했는데, 궤변의 극치였다. 민주당의 불신임투쟁이 겁이 나서 중간평가를 유보했다는 거였다. 노태우정권과의 막후거래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민중투쟁은 격렬했고, 민중운동가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나 민주화의 전망은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태우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중간평가를 야당들의 야합으로 놓쳤으니 양김씨의 야당에게 희망을 걸 수는 없었다.
이런 경우 전민련이 새로운 희망을 주는 집권대체세력이 되어야 했으나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전민련은 1989년 한해 동안 무려 10여 차례 이상 노태우정권 퇴진투岾?전개했으면서도 노태우정권이 퇴진하면 어떤 세력이 집권할 것인지 밝힌 일이 없다. '우리가 집권하겠다'든가 아니면 '다른 어떤 세력이 집권하도록 하겠다'고 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무책임하기 짝이 없었다.
이래서는 운동도 정치도 사회도 발전할 수 없다. 국민에게 희망을 줄 집권대체세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민중투쟁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민중운동역량은 더 약화될 뿐이다.
6월민주항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그 당시 양김씨라는 집권대체세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1991년도 강경대군 사건 때는 6월민주항쟁에 버금갈 정도로 민중투쟁이 치열했는데도 민중운동이 승리하기는커녕 크게 쇠락한 것은 집권대체세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전략전술보다 국민에게 희망을 줄 집권대체세력이 있게 하는 게 중요했다.
따라서 운동의 발전이나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집권대체세력이 있어야겠는데, 양김씨의 야당도 전민련도 집권대체세력이 될 수 없어 새로운 정당의 건설이 요구됐다. 그래서 나는 전민련 중앙위원회에서 '합법정당' 건설을 제안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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