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하반기 재계의 이목을 한 데 모을 드라마가 시작됐다. 국내 최대 건설사인 현대건설 인수전의 총성이 울렸기 때문이다. 채권단이 24일 현대건설 주식 3,887만9,000주(발행주식 대비 34.88%)를 팔겠다고 공고를 낸 만큼 입찰 희망자는 누구라도 뛰어들 수 있다. 그러나 인수전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구 현대ㆍ기아차 회장의 2파전이 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현 회장이 정 회장의 동생인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아내란 점에서 제수와 시아주버니의 모진 승부가 펼쳐질 수 밖에 없는 형국이다.
목숨 건 현 회장, 여유만만한 정 회장
선전포고는 현대그룹에서 했다. 현대그룹은 21일부터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고 정몽헌 회장의 흑백 사진이 담긴 TV 광고를 내보냈다. ‘아버지’가 현대건설을 세웠고, ‘아들’이 이를 지키기 위해서 사재를 출연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현대건설이 이들의 모든 것이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사실 현대그룹으로서는 현대건설 인수에 그룹의 모든 것을 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대그룹의 모태였다는 역사적인 연고 이외에도 현대건설이 현대상선의 지분 8.3%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상선의 현 회장 우호 지분은 43%를 넘는 수준이나, 현대중공업과 KCC 등이 갖고 있는 지분도 31%에 달해 현대건설이 넘어갈 경우 자칫 경영권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 특히 현대상선이 사실상 현대그룹의 지주회사란 점에서 그룹의 사활이 걸려있다.
이에 비해 현대ㆍ기아차는 현대건설 인수가 현대그룹만큼 절박하진 않다. 인수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럴 이유도 없다. 오히려 현대건설의 인수는 ‘왕자의 난’이후 자동차만 떼어 줬던 고 정 명예회장의 뜻과 거리가 있는데다 제수의 밥그릇을 탐내 집안을 시끄럽게 한다는 지탄을 받을 수도 있는 사안이다. 무엇보다 자동차라는 핵심 역량에 집중하는 때에 큰 돈을 들여 건설사를 인수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 지도 따져볼 일이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차를 판매하는 현대ㆍ기아차로서는 대북 리스크와 연결될 수 있는 현대건설 인수에 신중할 수 밖에 없다. 노조가 현대건설 인수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고민거리다. 아직 공식적으로는 현대건설을 인수하겠다고 표명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풀이된다. ‘모든 것을 건 승부’ 대 ‘안 해도 그만’인 싸움이라는 점에서 치열함이 서로 다르다.
자금력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그러나 이번 인수전은 결국 누가 더 높은 가격을 써 내느냐에 따라 결판날 수 밖에 없다. 명분이 아니라 자금력이 승부처가 된다는 얘기다. 현대건설 인수가는 시장 전망 및 경영권 프리미엄 등에 따라 다르지만 최대 4조원 안팎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1조5,000억원의 현금성 자산을 확보한 데 그친 현대그룹으로서는 그 이상의 자금을 외부에서 수혈해야 한다. 반면 현대ㆍ기아차는 이미 4조5,000억원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한 데다가 계열사를 동원할 경우엔 10조원 가까운 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게 시장 분석. 현대그룹도 선박 등을 담보로 자금을 빌리거나 계열사를 통해 회사채를 발행할 수도 있겠지만, 돈싸움이 된다면 결론은 이미 나 있는 셈이다.
범현대가 지원 및 막판 중재 가능성
현대중공업과 KCC의 움직임도 관전 포인트다. 범현대가의 모태인 현대건설이 며느리 집안에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없다며 현대ㆍ기아차의 인수전에 참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대결 구도가 정씨(鄭氏) 대 현씨(玄氏)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막판 중재책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에 절박한 이유가 현대상선 지분 때문인 만큼 현대건설이 가진 현대상선 지분을 현대그룹에 넘기는 대신 현대건설은 범현대가가 가져가는 시나리오다.
재계 관계자는 “대형 매물의 인수ㆍ합병(M&A) 결과는 2008년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의 막판 해프닝과 2009년 대우건설을 M&A했다 다시 내 놓은 금호아시아나의 예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며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지는 지켜볼 일”이라고 말했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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