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오래된 얘기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두 아들에게 유언장을 썼다. "나의 땅을 둘이서 공평하게 나눠 가져라. 절대 싸우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공평하게 나누려니 싸움이 없을 수 없었다. 큰 아들이 생각하는 공평과 작은 아들이 인식하는 공평이 달랐기 때문이다. 두 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땅의 지적도를 펼쳐놓고 하염없이 다퉜다. 논 밭 과수원과 우물 도로 주택 등이 섞여 있는 아버지의 땅을 공평하게 나누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식구가 많은 형은 형대로, 새 살림을 차려야 하는 동생은 동생대로 이렇게 저렇게 챙겨야 할 요인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정치적 타협'을 이루지 못하고 법원에 '유산 토지 균등분할 소송'같은 것을 냈다. 각자 제출한 정당성의 사유가 요즘으로 치면 A4용지 100장을 넘었을 터이다. 하지만 판결문은 하나의 문장으로 충분했다. "형이 줄을 긋고 동생이 선택하라." 아버지의 유산이 얼마나 공평하게 두 형제에게 나눠졌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로 기억한다.
공정 공평을 위한 현명한 지혜
으레 이 때쯤이면 '추석민심'이란 게 있었고, 정치권은 그것을 사전에 퍼뜨리고 편리한대로 주워담느라 분주했었다. 그런데 올해엔 이상하리만큼 추석민심이란 게 없었다. 뚜렷이 부각된 정치적 사안이 없는 탓이 컸겠지만 '공정과 공평'이란 사회적 이슈가 워낙 강했기 때문인 듯하다. 모두가 불공정한 사례를 경험했고, 그 누구도 살아오면서 공평함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한 대화의 귀퉁이에 '한 쪽이 나누고 다른 한 쪽이 선택토록 하는 판결'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과정의 주도권을 쥔 쪽에서 결과물의 선택까지 갖도록 되어 있는 사회는 공정하지 못하다. 결과물의 선택을 염두에 두고 과정을 이끌어가는 행위는 공평하게 마무리될 수 없다. 제로섬으로 이해가 충돌하면서 동반자적 공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양자 사이에선 특히 그럴 터이다.
사회 정치 남북간의 문제에까지 한 번쯤 적용해 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사안에서 이 판결은 의미 있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좀 더 힘이 세고 과정을 통솔할 수 있는 쪽에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상대에게 그 중 하나를 고르도록 하는 것이다.
상대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안을 선택할 것이 분명한 만큼 몇 가지 안을 궁리하는 쪽에선 어느 것이 선택되더라도 스스로에게 손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공정한 방안을 궁리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의 입장과 마음을 충분히 살펴야 하는 과정이 전제되므로 그것만으로도 공정과 공평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겠다. 서울시와 시의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서울광장 이용 문제도 그렇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줄다리기를 벌이는 업무계약에서도 유효한 선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동반자적 적대관계가 본질인 정치권의 여야 알력, 여권 내부에서의 계파간 갈등, 야권에서 벌이는 그룹별 주도권 싸움 등에도 이러한 '나눔과 선택의 분리'는 적용될 여지가 있겠다. 자기가 나누고 자신이 선택하겠다는 심보를 갖고 있는 한 싸움은 중단될 수 없고, 결국 제3자의 판결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과정과 결과를 분리하는 방안
조금 더 상상력을 넓힌다면 남북문제도 그러한 여지는 있어 보인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하고 제안하는 것은 '하자는 대로 하라'는 강요에 불과하다. 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이렇게 할 것이냐' 혹은 '저러저러한 방식으로 저렇게 할 것이냐'고 상대의 선택을 구하는 게 옳다. 이런 저런 방식 모두가 상대가 심각하게 저울질해야 할 수준을 갖춰야 함은 물론이다.
공정과 공평의 한 방편으로 '나눔과 선택의 분리'라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문제는 없지 않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형제간의 다툼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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