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속에 철분이 과다하게 쌓이는 혈색소침착증(혈색증)은 서유럽인들에게 흔한 유전병인데, 서유럽인 서너 명당 한 명꼴로 이 유전인자를 갖고 있다. 이를 치료하지 않으면 잉여 철분이 몸 구석구석에 계속 쌓여 결국 관절과 주요 장기가 손상되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
알츠하이머병이 혈색증 유전자와 관련돼 있음을 밝혀 박사학위를 받은 의 저자인 미국의 신경유전학자이자 진화의학자 샤론 모알렘 역시 이 유전인자를 물려받았다. 저자의 궁금증은 여기서 출발한다. "이렇게 인체에 해로운 유전인자가 왜 진화 과정에서 도태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는 것일까."
는 이처럼 나쁜 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들이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은 이유를 탐색한다.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과학적 근거나 때론 역사적 상상력도 동원하며 질병 유발 유전자들이 인간 생존에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밝혀내는데, 결론은 이 유전자들 역시도 진화적 적응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혈색증을 보이는 사람들은 중세 유럽을 뒤흔든 흑사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낮았다. 혈색증 환자의 몸 속에는 철분이 많이 쌓이지만 침입 병원균을 포식하는 대식세포에는 철분이 부족한데, 이로 인해 침입 세균을 제압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숨졌던 흑사병 창궐 과정에서 혈색증 유전자를 가진 이들은 상대적으로 생존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당뇨병 역시 인류의 빙하기 적응의 산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혈액에 당이 쌓이고 자주 소변을 봐서 혈액 농도가 높아지면, 혈액의 어는 점이 낮아져 동사(凍死)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흑인에게 볼 수 있는 유전병인 겸상적혈구빈혈증은 말라리아에 강한 내성을 갖고 있다. 질병을 유발하는 나쁜 유전자가 알고 보면 우리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물론 한 세대에게 진화적 해결책이었던 것이 다른 세대에겐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생명은 창조가 끊임없이 진행되는 상태로, 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메시지다. 그는 "우리와 질병의 관계는 종전에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며 "생명이란 복잡하게 얽힌 선물이란 점을 인식하기를 바란다"고 강조한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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