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하는 영화마다 빠지지 않고 보는 영화광 친구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악마를 보았다> 봤어?" 악마를>
"아니, 말만 들어도 끔찍해서."
"<김복남 살인사건> 은?" 김복남>
"그 것도..."
"글 쓴다는 사람이 무섭다고 그런 문제작도 안 보면 어떡하니?"
친구는 한심해서 혀라도 찰 기세다. 겁 많은 나는 민망해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솔직히 사람을 죽이는 것도 성이 안 차 온갖 잔인한 보복을 행하는 이야기가 나는 너무 무섭다.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끔찍한 묘사도 무섭고, 어지간한 복수로는 풀리지 않는 질긴 원망도 무섭고, 그런 핏빛 복수의 이야기를 만들고 즐기는 사람도 무섭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가 아닐 것이다. 제 아무리 독창적인 영화도 현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 화제가 된 영화들은 깨진 거울과도 같다. 깨진 거울에 비친 현실은 그로테스크해 보이지만 그 또한 엄연한 현실이니, 바로 복수에 매달린 이 사회의 모습을 투영한다.
그렇다. 바야흐로 복수의 시대다. 물론 복수의 드라마도 복수를 꿈꾸는 마음도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새삼스러운 것은, 요즘처럼 사적인 복수심이 대중적으로 공공연하게 표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발달하고 법이 체계화되면서 인류는 사적인 복수를 공적인 법체계 안에서 해결하기 위해 애써왔다. 예컨대 기원전 1750년경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법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론 가해자의 신분에 따라 형벌을 차등 적용하고 사적 복수를 금지한 합리적인 법 정신을 담고 있었다. 가난한 채무자를 위해 이자율을 제한하고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해준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을 상기한다면, '눈에는 눈'이라는 탈리오의 법칙이 복수를 부추긴 것이 아니라 실은 복수를 규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한 보복에 나서려는 피해자의 사적인 복수심을 법적인 규정으로 제한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엔 공적 제재 대신 사적인 복수만 횡행한다. 대표적인 것이 도박 파문과 병역기피 의혹, 학력위조 시비에 시달리는 몇몇 연예인들에 관한 반응이다.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 법적인 처벌을 받을 텐데도 사람들은 비난과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다시는 연예계 활동을 못하게 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 복수다. 시인 김수영이 자탄했듯이, 정작 분노해야 할 것에선 비켜나 "조그만 일에만 옹졸하게 반항"하는 비겁이다. 부동산투기, 직권남용, 위장전입, 특혜 취업 등 온갖 위법행위가 드러났음에도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 고위 공직자들에 대해선 벌써 침묵하면서 연예인들만 문제 삼는 것은 혹 약한 자에게 더 가혹한 심리는 아닌가.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은 연예인 개인의 치부가 아니라 이 사회의 잘못된 소득구조이며, 돈과 권력을 동원해 병역을 기피하는 불공정한 관행이며, 실력보다 학력을 대우하는 왜곡된 시선이다.
이 모든 배후에 침묵하면서 몇몇 연예인의 부도덕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치사하고 부질없는 짓이다. 설사 그들 몇몇을 퇴출시킨다 해도 이 사회의 그릇된 구조가 온존하는 한 그런 일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공익을 내세워 그들에게 돌을 던진다 해서 사회구조에 연원한 좌절과 분노가 해소되지는 않는다. 복수는 그저 복수를 부를 뿐이니, 지금 필요한 것은 눈 먼 복수심이 아니라 눈 밝은 분노이다. 4,000년 전 바빌로니아인들이 세우고자 했던 공정한 사회를 향한 분노 말이다.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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