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경북 구미시 도량동 금오종합사회복지관. 150여명이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잡았다. 나름 깨끗한 옷으로 차려 입었지만 검게 탄 얼굴 등 온몸에 배인 고생한 흔적을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구미 지역에 정착한 새터민들이다. 추석을 맞아 동병상련의 아픔을 지닌 새터민들이 조용히 차례를 지내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대부분 함경북도가 고향이었다.
합동차례지만 그 흔한 외부인사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기관장이나 지역 유지들을 아예 초청하지 않았다. 고향사람끼리 그 동안의 고생담을 털어놓고 마음껏 울고 웃기 위해서다. 더 이상 남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서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복지관 1층 회의실에 마련된 차례상은 조촐했다. 병풍도 없이 빈 벽에 '함북 어랑군 A氏' 등 A4용지에 약식으로 쓴 지방(紙榜)으로 조상의 혼백을 모셨다. 북한에서도 북어 등 건어물을 올리는 곳이 있지만, 이날 모인 함북출신들은 말린 포 대신 통째로 찐 생어물을 올렸다. 북한식 만두와 옥수수 국수도 선보였다.
차례상 앞에 선 새터민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 3번 절을 했다. 망자에겐 두 번 절하는 우리의 풍습과 사뭇 달랐다. 함북 청진시 출신인 한모(63)씨는 "북한에서 가장 큰 국경일은 김일성 부자의 생일인데, (남한에서)조상을 섬기는 제사법은 굉장히 간소화된 것 같다"며 "오랜 분단 때문인지 상 차리기나 절하는 법까지 남북이 너무 다르다"고 말했다.
새터민들은 조상들에게 술을 따르고 음복을 마친 뒤 회의실 바닥에 앉아 서로 안부를 나눴다. 한쪽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울음바다가 됐다. 사연 없는 사람이 없기에 울음을 말리던 이도 같이 부여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탈북 과정에서 10명이 나서면 3, 4명은 붙잡혀 송환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성공한 이들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탓일게다.
최근 구미에 정착한 박모(33ㆍ여)씨가 자기소개를 하자 회의실은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이웃에 침을 놓다 불법의료행위로 당국에 끌려가 수모를 당한 뒤 탈북, 한국땅을 밟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그 과정에 3차례 위장결혼을 했고 5차례 인신매매단에 걸렸으며 9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다. 박씨는"모든 것이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절규했다.
대부분 안정적인 직장이 없고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홀로서기를 선언했다. 구미사랑새터민연합회를 만들고 자리가 잡히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소외계층을 돕는 등 사회봉사에도 나설 계획이다.
고향의 손맛을 살려 함경도식 만두와 순대를 생산해 일자리 창출 등 자립기반을 다지고 불우이웃돕기 성금도 마련한다는 당찬 복안이다. 북한식 요리의 시장성을 알아보기 위해 25일 구미시 해평면 도리사에서 열리는 산사음악회 때 만두와 순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장민송(35ㆍ여) 구미사랑새터민연합회장은 "탈북에 성공했지만 남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새터민들의 일자리 창출이 최우선 과제"라며 "사업이익이 늘면 연합회를 불우이웃을 돕는 봉사단체로 키우겠다"고 말했다.
구미=김용태기자 kr88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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