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들이 펜을 들었다. 아이 키우며 살던 평범한 주부들이다. 다양한 글쓰기 강좌를 통해 글을 배우면서 그들은 몰랐던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새 직업을 찾거나 사회적 영향력까지 얻어가고 있다. 주부들에게 글쓰기란 문학소녀의 꿈을 펼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나를 재발견하다
김소연(41)씨는 젊었을 때 외국인 회사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다가 결혼 후 13년간 전업주부로 지냈다. 우연히 아줌마들의 길찾기를 주제로 제작된 연극'내 나이 마흔에는'을 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됐다. 일기라도 써볼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2009년 3월 인터넷 주부 커뮤니티 줌마네(http://cafe.naver.com/zoomanett)가 개최하는 글쓰기 강좌의 문을 두드렸다.
"글쓰기를 배우다가 그림을 그려 볼 기회가 있었는데 뜻밖에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거에요. 밤을 새워 가며 마포구에 사는 여성 구직자를 위한 일자리 소개책자 의 일러스트를 그렸는데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는 지금 일러스트레이터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중학교 3학년인 큰 아이는 엄마를 그린 그림 밑에 '나이 40에 좋아하는 일을 시작한 우리엄마'라고 적었다. "아이들이 지지해 준다는 것이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남편도 밤 새서 작업하면 재밌냐, 좋냐고 물어보며 지원해줘요."
2002년 '대통령 쇼핑하기'라는 글을 잡지 에 실었던 박진숙(41)씨도 줌마네 글쓰기 강좌 출신이다. 장애아동 보육교사를 하다 2001년 그만둔 뒤 이 강좌를 들었고, 2002년 당시 후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권영길 민노당 의원을 줌마네 회원들과 함께 인터뷰했다. 주부의 관점에서 주부들이 파업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딸의 초경일을 기억하는가라는 등의 질문을 던져 후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이 인터뷰 일화는 일간지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후 박씨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했고 지금은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강사로 청소년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대안학교 멘토로 활동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줌마네 글쓰기 강좌는 올해 11번째로, 매년 12주 과정에 20명의 수료자를 배출하고 있다. 처한 상황이나 글을 배우는 동기는 제 각각이다. 11기생으로 현재 수업을 듣고 있는 오은해(55)씨는 "18년의 부동산 중개업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글쓰기를 배워 부동산 칼럼니스트가 되겠다"고 한다. 평범한 주부인 이춘화(44)씨는 소박한 인생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겠다는 일념을 갖고 있다. 그는 "글쓰기를 배우면서 놓치기 쉬운 일상을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며 "삶의 여운을 담은 글과 일러스트를 담은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줌마네에서 배출한 여성 중에는 여성지나 육아지 등에 글을 싣거나 연극배우, 일러스트레이터 등으로 인생의 새로운 문을 연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글은 힘이다
글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얻게 된 아줌마들도 적지 않다. 요리와 캠핑 전문 블로그 'DAL님, 일상에 탐닉하다'(http://blog.naver.com/oversleep)를 운영하는 양경순(34)씨는 2006년 우연히 전자오븐 체험단에 뽑힌 것을 계기로 블로그에서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됐다. 요리, 캠핑 등 소소한 일상생활에 대한 견해와 사진을 담고 있는 그는 블로그 이웃이 3,000명에 달하는 파워 블로거다. 양씨는 "인터넷에서 짧은 댓글 하나로 따뜻함과 친근감을 느끼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글을 통한 공감의 기쁨을 털어놓는다.
파워 블로거 문성실씨의 '문성실의 이야기가 있는 밥상'(http://blog.naver.com/shriya)은 하루 방문객만 5만 명이 넘는다. 문씨는 요리법 공개는 물론 직접 써본 주방용품을 공동구매하기도 하는데 단일 상품이 2억원 어치가 팔린 적도 있다. 지난해 9월에는 블로그 방문객들에게 기부금으로 전환되는 네이버 콩 모으기를 독려해 2,000만원을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다.
주부 블로거들의 힘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생활밀착형 글에서 나온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주부들을 일컬어 와이프로거(와이프와 블로거의 합성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여전히 문학을 꿈꾸다
중년을 훌쩍 넘겼지만 문학소녀의 꿈을 버리지 않고 새로 펜을 잡는 이들도 적지 않다. '침엽의 생존방식'이라는 시로 2008년 동서커피문학상 시 부문 대상을 받은 박인숙(47)씨는 2000년까지 보습학원 강사였다. 2005년부터 시인의 꿈을 키우며 신춘문예 당선자를 선생으로 삼아 습작을 시작했다. 그는 "인간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치료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며 "앞으로는 소설을 배워서 써보겠다"고 말했다.
평범한 주부로 아들 둘을 모두 키워낸 조남옥(54)씨는 한국여성문예원에서 6개월째 시 낭송과 시 쓰기 수업을 듣고 있다. 한국여성문예원을 찾는 이들은 여전히 문학의 꿈을 간직한 40~60대의 주부들이 대다수이고, 간혹 40~50대 직장인 또는 자영업을 하는 남성들도 끼어있다.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자작시를 올리는 조씨는 뒤늦게 글 쓰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그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글로 쓰는 게 즐겁고 댓글이 달리면 뿌듯하다"며 "힘들어서 쓰지 말까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다시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 '이곳'을 두드려보세요
쓰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엄두가 안 난다면 다음과 같은 글쓰기 강좌가 도움이 될 수 있다.
● 주부커뮤니티 줌마네는 매년 3월 12주 과정으로 주1회(아침 10시30분부터 오후 3시30분까지) 글쓰기 강좌를 진행한다. 20여명의 수강생을 모집하며 강좌 이후 단행본을 발간하고 잡지 등에 기고를 한다. 올해는 신수동에서 글쓰기 강좌를 하고 12월 초 신수동 동호인 잡지 을 출간하는 '신수동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수강료 50만원, 마포구 주민은 15만원. 문의전화 김진희씨. (010)9909-7950
● 1982년에 문을 연 한국여성문예원은 시 낭송과 시 창작반을 운영하는데 수강생 중에는 실제 등단에 성공한 이들도 있다. 김도경 원장은 "그동안 한국여성문예원을 거쳐간 이들만 1,000여명이 넘는다"며 "40대부터 60대 중반까지 여성은 물론 중년 남성들도 강좌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각 9개월 과정으로 수강료는 시 낭송 월 1만원, 시 창작 월 5만원. (02)2268-9210
● 백화점 문화센터에서도 글쓰기 강좌를 찾을 수 있다. 롯데백화점 잠실점 문화센터(02-2143-7061~3)는 박동규의 '시의 창작과 이해' 및 '목요 수필교실'을, 본점 문화센터(02-726-4151)는 구효서의 '소설 창작 실습' 및 '시 창작 교실'을 열었다. 매 시간 회원의 자작시를 감상, 평가하거나 교사가 첨삭해주는 형태로 진행된다. 12주 과정. 수강료 10만~15만원.
■ '줌마네 ' 글쓰기 강좌 "별칭 부르며 마음의 벽 허물어"
"아직 왕비와 달님은 안 왔어요. 바람은 오늘 못 온다고 했고요."
8일 오전 10시40분 서울 마포구 신수동 주민센터 제2강의실에는 14명의 아줌마들이 모였다. 오소리, 바람, 핑크, 코알라, 바다, 엄네, 수세미, 성악가, 작은아이, 달팽이, 딴지, 호박넝쿨, 나무숲, 송알송알. 모두 아줌마들의 별칭이다. 이숙경 줌마네 대표의 별칭은 오소리다. 줌마네 회원들 사이에서는 줄여서 '오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별칭은 벽을 허물고 동등한 관계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이날의 수업 주제는 '보는 방법'. 과제 검사가 시작됐다. 지난주 주어진 과제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눈길을 끄는 뭔가를 찾아 스케치하고 묘사해오는 것이다. "글을 읽는 것은 다른 사람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펼쳐지는 세상이야기를 들어 볼까요."(이숙경 대표)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써온 글을 큰 소리로 읽는다. 송알송알(송재금·43)은 '그는 행복할까'라는 제목으로 과천 정부청사 은행 한복판에서 자작곡을 부르는 30대 남성에 대해 쓴 글을 발표했다. 딴지(이효경·45)는 '해피엔드 or 해피엔딩'으로 집에서 기르던 장수풍뎅이의 관점으로 쓴 글을 읽었다. 잡지 책에 실린 사진 한 장, TV속 노래를 가지고 글을 쓴 이들도 있었다. 생활 속에서 누구나 겪었거나 또는 겪지 않아도 궁금했던 일상적인 소재 덕분에 수업시간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날 처음 수업에 들어온 수세미(오진숙·64)는 신고식(?)부터 치렀다. 10분간 사람들이 수세미를 관찰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순서다. 사람들은 "자녀분들은 이미 출가를 시켰어요. 뭔가 배우고 싶은 욕망이 많은 분이고. 모든 것에 늘 관심을 갖는데 여건이 따라주지는 않는 거에요. 하하하"라고 수세미에 대해 말했다. 수세미는 "자녀들 눈높이에 맞춰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글쓰기 강좌를 찾았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후 달팽이(유현정·33)를 그리는 시간.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달팽이를 그렸다. 옆자리에 앉은 왕비는 달팽이의 큰 옆모습을, 멀리 앉은 나무숲(김영숙·42)은 상반신을 그렸다. "옆에서 보느냐 정면으로 보느냐 일어나서 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우리는 그리고 싶은 지점, 글을 쓰고 싶은 지점을 만나기 위해 바라보는 것이에요." 이 대표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상 속에서 보석 같은 순간은 항상 일어나고 있어요. 이를 프레이밍하고 이야기를 엮어내는 게 바로 글 쓰는 사람의 역할입니다."
수강생 모두 한 교회가 운영 중인 카페로 이동했다. 이곳에서부터 1시간 동안 신수동 골목길을 돌아다닐 계획이다. 골목길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써야 할까. 나만의 시선이 왜 중요한가를 가슴에 아로새긴 이들은 작은 노트를 펼쳐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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