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줄 서세요, 무거운 원단 옮기려면 차례차례 날라야 합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23일 오전 서울 양천구 신월2동. 소규모 봉제공장인 국일사 앞에 양천구 공무원과 자원봉사자 등 수십 명이 모였다. 연두색 조끼 차림에 목장갑을 낀 이들은 관내의 수해 피해자를 돕기 위해 휴일도 반납한 채 오전부터 구슬땀을 흘렸다.
흙탕물에 절은 원단들은 본래의 색을 잃어버렸고 각종 쓰레기는 100ℓ짜리 쓰레기봉투를 금세 채웠다. 원단 자재가 있던 지하에서 직원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남은 옷감들을 씻고 있었다. 30여년간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김영자(80)씨는 “3~4년 전부터 이 지역에 해마다 물난리가 났는데 올해는 추석 명절에 이런 피해를 입어 더욱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절기상 추분인 이날 하늘은 언제 찌푸렸냐는 듯 푸른 자태를 뽐냈지만 수마(水魔) 가 할퀴고 간 상처는 주민들의 깊은 시름으로 남아 있었다. 연휴 첫날인 21일 이 지역에 내린 비는 시간당 최대 93㎜로, 103년 만의 최다 강수량인 269㎜를 기록했다.
거리에 넘쳐나던 물은 자취를 감췄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침수 피해로 고통스러워했다. 길거리에는 못 쓰게 된 침대 매트와 냉장고, 가재도구들이 쌓여 있었고 골목마다 늘어선 건조대에는 젖은 옷가지들이 널려있었다.
신성빌라 반지하 주택에 사는 김모(62)씨는 “마치 물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왔다. 2001년 이후 이런 적은 처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가재도구는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채 마르지 않은 방 바닥에는 아직 물기가 흥건했다. 흙탕물이 들어가 못 먹게 돼 버린 새우젓을 내다버리는 김씨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아무리 예상을 벗어난 국지성 폭우였다지만 공무원의 늑장 대응으로 피해가 더 커졌다는 원성의 목소리가 높았다. 20여년간 이 지역에 살았다는 오모(52)씨는 “천재(天災)라면 천재고 인재(人災)라면 인재인 줄 알아야지 별 수 있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마치 ‘더 이상 기대를 해서 무엇 하겠나’라는 표정을 지었다.
침수 피해를 입은 주민에 대한 지원이 제때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대한 불만도 많았다. 신월1동 주민센터를 찾은 김모(33)씨는 “어제 피해 신고 전화를 했는데 오늘 (조사를 하러) 나온다던 담당공무원들이 아직도 안 와서 (주민센터에) 왔다”며 “다 치워놨는데 이제 증빙자료가 필요하다고 관련 사진을 제출하라고 하니 도대체 어떡하란 말이냐”고 분통을 터트렸다.
반복적인 침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배수 시설 확충 등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이날 현장을 찾은 허광태 서울시의회 의장은 “서울 시내 배수관을 한꺼번에 교체하기에는 예산 문제 등 어려움이 많다”며 “거리와 공원에 저수조를 추가 설치하는 등 국지성 호우에 대비해 단계적인 보완책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기습폭우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서울 강서구, 양천구의 주민과 지역 국회의원들은 함께 정부에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나라당 구상찬 의원과 김용태 의원, 민주당인 노현송 강서구청장과 이제학 양천구청장은 “물폭탄을 맞은 주민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줄 수 있도록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 긴급 구호와 적절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 강서와 양천의 경우 서울 서남권의 대표적 상습 침수지역이라며, 대형 저류조를 만들고 하수도 용량을 늘려 항구적인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정부와 서울시에 촉구했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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