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 있으면서도 어딘가 허점 있어 보인다. 맑은 피부가 청순함을 한껏 강조하는 얼굴엔 기성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도 풍긴다. 그래서일까. "헤픈 게 나쁜 거야?"('가족의 탄생')라는 대사가 제법 어울렸고, 청정한 사랑의 파도에 몸을 싣는 앳된 여고생('사랑니') 역도 제격이었다. 스타나 연예인보다 배우라는 이미지가 더 강해서인지 똘똘하고 당차 보이는 평범한 취업재수생('내 깡패 같은 애인') 역할도 안성맞춤이었다.
16일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신작 '옥희의 영화'에서 자신의 전공학과 교수와 과 동기 사이에서 사랑을 찾아가며 은근히 팜므파탈의 면모를 보이는 옥희의 이중생활도 그이기에 고개가 크게 끄덕여진다.
정유미(27)는 떠들썩한 흥행으로 대중의 눈길을 끈 배우는 아니다. 그래도 연기 이력은 만만치 않다. 2004년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으로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뒤 홍상수, 정지우, 김태용 감독 등 작가주의 성향이 강한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멧돼지와 인간의 사투를 다룬 '차우' 등 상업성 짙은 영화에도 출연하며 영역을 조금씩 넓히고 있다.
'옥희의 영화' 촬영은 그에게 하나의 유희와도 같았다. '내 깡패 같은 애인' 막바지 촬영으로 지쳐 있을 무렵 홍 감독이 "촬영 쉬는 날 언제냐. 겨울 스케치나 함께 하자"며 전화로 출연제의를 해왔다. 바로 다음날 아침 촬영장으로 향했다. 제목도 정해지지 않았고, 스태프는 달랑 4명. "과연 영화가 완성은 될까. 개봉을 하긴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몸도 좋지 않아 툴툴거리며 하루를 보냈지만 실험적인 촬영이 너무 신기해 또 다른 에너지가 생겼다"고 말했다. "영화는 장르 불문하고 좋아하고, 출연작도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는 그의 무던한 성격이 무보수 저예산 영화 '옥희의 영화' 출연에도 적용된 셈이다.
"영화 속 크리스마스는 정말 크리스마스에 찍고 신년 1월 1일 배경 장면도 실제 그날 찍었어요. 영화 속 그날의 기운을 실제 느끼면서 찍는 재미가 묘하더군요. 아차산 장면 찍을 땐 홍 감독님이 짐 보따리를 들고 산을 오르는 모습에 너무 감동 받아 '아 (뒷일은 이제) 몰라. 그냥 즐기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년배에 비해 꽤 이력이 붙었지만 사람들은 아직 그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서운함도 없고 부러움도 없다. 열심히 찍은 TV 드라마나 영화를 사람들이 인정해주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정유미는 "연기를 잘하고 싶고 노력을 계속하려 한다"고 하나 "아직 스스로를 배우라 할 수 없다"고 했다. "(주연인)'내 깡패 같은 애인'을 찍을 땐 이제 떳떳한 배우가 됐다 생각했는데 정작 영화가 끝나고선 아직도 멀었다며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고도 덧붙였다. "배우는 연기 이외에 홍보 등의 몫도 잘해야 하는데 아직 그런 그릇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심은하씨 닮았다는 말도 나온다"고 하자 "다른 분들 닮았다는 말은 많이 듣는다"고 답했다. 누구냐고 묻자 발개진 볼에 어색한 웃음을 담으며 "몰라요"라고 외면한다. 미모에선 다른 배우에 비교되고 싶지 않은, 젊은 여배우의 자존심이 느껴졌다. 어쨌든 그는 이룬 것보다 이룰 것이 많은 배우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