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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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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대필

입력
2010.09.20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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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 곳곳에‘대서방(代書房)’이 성행했다. 말 그대로 대신 글을 대신 써주는 곳이었다. 주로 법률 지식이 없는 서민을 위해 공문서를 작성해 주거나, 계약서를 작성해 주고 수수료를 받았다. 당연히 법을 공부했지만 ‘입신’에 실패한 사람이나 공무원 출신이 많았다. 이동하가 소설 에서“법을 하다 망하면 대서방이라도 할 수가 있고, 사업을 하다 망하면 장돌뱅이라도 될 수가 있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서방에서는 드물게 한글을 모르는 어머니가 베트남에 파병된 아들의 편지를 들고 오면 답장을 써주기도 했다.

▦대서방은 문맹시대가 낳은 이색 직업소였다. 그렇다고 대서나 대필이 ‘문맹’의 산물만은 아니다. 글은 알지만,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필 역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어져 오고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유명한 희곡 에서 코가 기형적으로 생긴 시라노는 대필해주는 친구의 연애편지를 통해 친척 여동생 록산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최근 선보인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 김인숙의 소설와 임명태의 의 주인공 역시 대필작가이다.

▦문학과 영화 속의 얘기만은 아니다. 유명인의 자서전은 대부분이 대필작품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요즘은 아예 대필을 자처하는 전문작가, 자서전을 대필로 완성해 출간해 주겠다고 공공연하게 떠드는 전문출판사까지 있다. 거액을 조건으로 유명인의 자서전 집필(대필)을 제안 받은 언론인도 있다. 자서전만이 아니다. 작가의 유명세를 이용한 기획출판물은 10권중 6, 7권이 대필이라는 얘기도 있다. 몇 년 전에는 유명 화가이자 방송인이 대필 의혹에 휩싸였고, 2년 전에는 한 인기 아나운서의 베스트셀러가 대역(代譯)논란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유령(대필)작가도 어엿한 직업이다. 연설문을 작성하는 스피치 라이터도 일종의 대필작가이다. 그렇더라도 대필에도 분명 한계는 있다. 글 솜씨가 없어 문장을 다듬는 정도는 몰라도, 창작까지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은 도둑질이고 사기이다. 대입수험생의 자기소개서를 대필해주는 비밀학원까지 생겨 당국이 수사에 나섰다. 자기표현 앞에 쩔쩔매는 아이들도 딱하지만, 자식의 영혼까지 남에게 맡기는 부모들이 더 한심하다. 입학사정관들이여! 비록 서투르지만 진솔하게 직접 자기 손과 마음으로 쓴 ‘나의 고백’을 가려내, 그것을 소중히 하는 눈과 지혜가 있기를.

이대현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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