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고(蘭皐) 김삿갓(金炳淵ㆍ1807~1863)은 우리 문학사에서 한문학의 마지막 시대를 장식한 작가로, 방랑의 생애와 풍자적 세계인식에서 특징적인 존재이다. 스스로 답청유자(踏靑遊子) 행락소년으로 자처했다는 김삿갓이 특히 금강산을 이웃집 다니듯 했다는 말은 그의 금강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천하를 떠도는 자가 또 가을을 맞아
시붕과 언약하고 금강산 산사에서 만났다
소동의 사람들도 함께 와 흐르는 물도 암암한데
절로 돌아가는 중의 뒤로 흰 구름이 뜬다.
삼생의 소원을 내 이제 약간 푼 셈이니
크게 마심이 만 가지 수심을 능히 풀만 하도다.
맑은 느낌을 어렴풋이 붓 들어 감나무 잎에 쓰고
잠깐 누어 서쪽 수풀에 비 돋는 소리가 그윽함을 듣는다.
[江湖浪跡又逢秋 約伴詩朋會寺樓 小洞人來流水暗 古龕僧去白雲浮
薄遊少答三生願 豪飮能消萬種愁 擬把淸懷書柿葉 臥聽西國雨聲幽]
가을의 금강산은 그 이름도 풍악산, 풍악의 가을은 "천하 가을의 대본영"이라니(이응수 ), 가을에 금강을 다시 찾은 행락소년으로서도 "이제 삼생의 소원을 약간 푼 셈"이라고 했을 터이다. 전생과 내생의 소원까지 푼 즐거움이며, 당연히 "크게 마셔 만 가지 수심을 능히 풀 만하다"고 하였으리라. 게다가 시 동인(詩朋)과 함께 한 가을 저녁에, 소동정(통천의 바닷물 호수, 석호)의 물빛이 비추는 절로 돌아가는 스님의 모습이 평화로운 금강의 가을 풍광이다.
금강산 시 이야기를 쓰자니, 오래 막혔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 훈풍으로 날아들었다. 남녘에 금강산 길이 열리면서 나는 외금강에 두 차례 내금강에 한 차례를 봉래산에 올랐다. 내금강이 열리던 날은 후배인 김상일 교수의 '금강산 시' 강의의 종강 기념 기행이라고 해서 대학원생들과 동행했다. 시집가는 기쁨으로 초등학생 손주까지 데리고 따라 나선 남녘 출신인 내 아내의 금강산 시 한 수는 분단 60년을 떠 돈 민족 이산(離散)의 역사로 읽히기에 김삿갓 금강산 시 뒤에 붙여본다.
금강 부부나무
내금강 표훈사 내리막 길가
포옹하다 뜨거워
녹아서 붙어버린 가슴으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산가족 상봉하던 부부의
타는 속과 가슴이 저러할까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허리가 부러져라 껴안은 것을 보면
선 채로 나무가 되어 부부로 살고 싶은 모양이다.
(이소희 시집 에서)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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