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의 신규여신 중단 등 공동제재를 풀어달라며 현대그룹이 제기한 가처분 신청에서 17일 법원이 현대 측의 손을 들어준 것은, 단순히 ‘현대의 승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향후 상황 전개에 따라 외환위기 이후 경제위기 때마다 단골 처방전으로 등장했던 ‘채권은행을 통한 기업구조조정(재무구조개선약정)’의 근간마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법원은 우선 채권은행들의 공동행동(신규대출중단+여신회수)에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 동안 채권은행들은 ‘말을 듣지 않는’ 기업에게 ‘힘을 합쳐 대출을 중단 또는 회수하겠다’고 압박해 왔던 것이 현실. 기업들은 금융기관과의 관계가 끊길 것을 우려해 꼼짝없이 요구에 따라야 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 같은 관행에 쐐기를 박았다. “은행들이 신규 여신 중단이나 기존 여신 회수 등 집단 제재의 근거로 내세우는 은행업 감독업무 시행세칙은 ‘주채권은행이 채권단 간사로서 협의회를 운영한다’고만 정했을 뿐, 공동의 제재까지 허용한 것은 아니다”는 것. 결국 전통적인 은행들의 압박수단의 근거를 정면으로 부정한 셈이다.
법원은 한 발 더 나아가 재무구조 개선약정에 대한 선택권이 기업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기업이 원하지 않을 경우, 그 결정은 존중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해석에 따라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채권은행들이 일제히 기업들의 신용상태를 평가하고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이나 퇴출을 유도했던 과정에 근본적 의문을 던질 수 있는 결정이어서 주목된다. 당국을 등에 업은 은행들이 등급을 정하면 군말 없이 따라야 했던 관행이 정면으로 도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 2, 3의 현대그룹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법원은 이 같은 논리로 향후 은행들이 감독규정에 제재의 근거를 마련한다 해도 “불법일 것”이라고까지 했다. 결정문은 “기업의 약정체결 의무가 있다고 전제하고 채권은행의 공동제재를 허용하는 감독규정이 있더라도 이는 법적 근거 없이 경제활동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어서 인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법원은 또 현대그룹에 대한 채권단의 공동제재 역시 “개별 은행의 독자적 판단을 가로막는 것이어서 법률이 금지하고 있는 ‘부당한 공동행위’에 해당한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금융당국 관계자는 “재무개선 약정을 통한 기업 구조조정의 필요성과 정당성은 여전히 유효한 만큼 법원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법적 근거를 향후 상위 법령에 반영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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