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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땅을 찾아서] (2) 새 세상을 향한 꿈의 발원지, 갈릴리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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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땅을 찾아서] (2) 새 세상을 향한 꿈의 발원지, 갈릴리 호수

입력
2010.09.16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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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참 이상하다. 예수가 “때가 찼다”는 소명의식으로, 새 세상의 도래를 선포한 곳이 하필 이렇게 아름답고 비옥한 호숫가라니. 예수가 공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곳인 갈릴리 호수 일대는 자연으로부터 이미 축복받은 땅. 야트막한 산과 비옥한 평야, 넓은 호수가 어우러져 있어 지금도 이스라엘의 손꼽히는 휴양지이며, 당대에도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비옥한 푸른 정원”이라 불렀던 곳이다. 모세가 삭막한 시나이 반도에서 정의를 세웠다면, 예수는 이 풍요로운 땅에서 무엇을 봤던 것일까.

지난 3일부터 7일까지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 순례단과 함께 한 성지 답사 여정에서 갈릴리는 이스라엘 북쪽이다 보니 마지막 날에야 찾게 됐는데, 그 전까지 일행의 투덜거림은 모세의 백성과 닮았다. “대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어디냐”는 거였다.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 남부로 들어온 후에도 삭막한 광야는 계속됐고, 예루살렘 등 이스라엘 중부도 바싹 타는 듯한 메마른 고원 지대나 다름없었다. 안내를 맡은 손문수(37ㆍ히브리대 박사과정) 목사는 “갈릴리 호수에 가면 다를 것”이라며 모세와는 달리, 일행을 살살 달랬다.

과연! 갈릴리 호수 일대는 지금 봐도 젖과 꿀의 땅 같았다. 호수 서북쪽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나가자 물빛과 하늘빛의 푸르름과 저 멀리 수풀과 밭의 녹음이 아늑하게 조화를 이뤘다. 북쪽으로는 예수의 주 사역 무대였던 가버나움, 게네사렛, 그리고 그 유명한 산상수훈을 전한 팔복산과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평야 등이 아스라히 펼쳐졌고 동쪽으로 골란 고원이 장막처럼 진을 쳤다. 남쪽은 옅은 안개 속에 수평선이 어렴풋이 보일 듯 말듯 한데, 마치 신비로운 고요 속에 들어온 듯했다.

그저 있기만 해도 가슴이 평화로워지는 곳. 하지만 이 풍요와 평화의 속내에 응어리져 있는 갈등과 고난의 역사를 떠올리면 마음이 그저 하늘거릴 수만은 없다. 당장만해도 호수 동북쪽의 골란 고원은 중동 분쟁의 핵심 지역 중 하나다. 이스라엘이 1967년 6일전쟁으로 강제 점령한 후 아직 시리아에 반환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둘레 51km의 갈릴리 호수는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 생명줄과 같은 식수원인데, 골란 고원은 이 식수원을 지키는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손 목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론조사에서 차라리 동예루살렘을 반환할지언정, 골란 고원은 반환하지 못한다고 응답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예수 시대에도 이곳은 지금 못지않은 갈등과 분쟁이 도사린 땅이었다. 유대 왕인 헤롯 안티파스가 이 지역을 통치하긴 했으나, 로마에 식민 지배된 상태였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당시 갈릴리인들은 제사장들에게 내는 십일조와 성전세, 로마에 바치는 공세, 헤롯이 건축공사에 충당하기 위해 징세한 세금 등 이중 삼중의 조세 부담을 져 수입의 30~40% 이상이 세금으로 나갔다. 소규모 자작농들은 흉작이라도 들면 빚더미에 올라 일용 노동자나 소작농으로 전락할 처지였다. 로마에 대한 저항 외에도 극심한 빈부격차, 즉 내부 양극화 문제까지 겹쳤던 것이다. 실제 갈릴리 지역에선 예수 탄생 전후인 BC 4년과 AD 6년, 조세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 로마군의 진압으로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28) 예수가 갈릴리에 온 것도 바로 이 고난 받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을 거라는 점은 두말 할 필요가 없으리라. 당시 최하층민이었을 노동력을 잃은 병자나 눈 멀고 귀 멀고 말 못하는 자 등을 치유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것도 굶주리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구제 사역이었다. 가난한 자나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고, 되레 부자는 천국 가기 힘들 것이라는 등 예수 말씀 곳곳에 드러나는 ‘세상 뒤바뀜’에 대한 언급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모세의 율법을 두고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벌인 논쟁에서도 드러나듯, 예수는 결국 모세가 구축한 ‘정의’를 소외된 자의 편에 서서 근원적으로 실현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 근원적 정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 방식은 2,000여년 기독교 역사 동안 숱한 논란의 대상이었고 극좌에서 극우까지 예수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었다. 분명한 것은 현실의 고난이 그치지 않는 한 다른 세상에 대한 염원은 계속되리라는 것, 그리하여 예수를 끊임없이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점이다. 그 염원의 발원지가 아름다운 갈릴리 호수라는 것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예수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한복음 7:37) 고 했다. 그 자신이 마치 갈릴리 호수인 것처럼.

갈릴리=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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