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미안한 세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미안한 세월

입력
2010.09.16 12:04
0 0

미안했다. 함께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 모임에 처음 나왔다는 너의 얼굴을 첫 눈에 알아보지 못해 미안했다. 멀리서 기차 타고 친구들 보고 싶어 찾아온 너의 이름을 반갑게 불러주지 못해 미안했다. 하지만 여전히 상처와 고통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너의 30여 년을 알지 못해서 더욱 미안했다.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큰 키와 멋진 몸매로 입대한 군대에서 6개월 만에 망가진 정신과 몸으로 제대하고 지금까지 약을 먹으며 살고 있는 너의 세월을 알지 못해 미안했다. 침묵을 강요당했던 시절, 도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 동문수학한 옛 친구들 은행 지점장이 되고 교감이 되고 지역신문사 편집국장이 되고 시인이 되어 즐거운 술잔을 나누는데 누가 너를 음료수 한 잔을 앞에 두고 침묵하며 앉아 있게 만들었는가?

소를 키우다가 실패를 하고, 자식 딸린 베트남 이혼녀와 결혼했다 이혼을 하고 시골마을에서 혼자서 살고 있는, 약을 먹지 않고서는 잠들지 못하는 네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친구들 얼굴이 보고 싶어 찾아 왔겠는가. 막차 시간에 황급히 돌아가는 너를 보내며 친구들이 울었다.

나도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졸업하고 열아홉 살의 나이로 군대에 갔다 제대 일주일 남겨두고 자살했다는 연락만 받은 또 한 친구의 얼굴까지 겹쳐 떠올라 울면서, 펑펑 울면서 돌아왔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만 중얼거리며 돌아왔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