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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사카와 형제, 노리타카와 다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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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사카와 형제, 노리타카와 다쿠미

입력
2010.09.15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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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청산의 대상인지는 모르겠다. 지난 달 NHK 방송이 특집으로 마련한 한일 젊은이들의 토론 프로그램 를 지켜보다가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역사 청산'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 때문에 도대체 언제까지 죄인이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우리는 언제 진심 어린 사과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한 적이 있느냐고 분개한다. 하긴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배용준인 사람들과, 일본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인 사람들(실제 여론조사 결과다)의 대화라니, 갈 길은 멀어도 한참 멀다.

예나 지금이나 국경을 넘어 인간을 고민한 아름다운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군국주의의 광풍 속에서도 그는 조선 예술의 옹호자이자 실천가였다. 그의 글은 광화문이 보전되는 계기가 됐고, 그의 노력으로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식민지 조선과의 관계에서 그는 '일본 속의 또 다른 일본인'으로 거의 신화화되었지만, 그가 멘토로 존경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와 다쿠미(淺川巧) 형제다.

야나기의 조선예술론, 민예운동의 출발점인 조선 백자를 소개한 사람은 도예가인 노리타카였다. "그가 없었더라면 조선과 관련된 일 가운데 절반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민족미술관은 그의 노력 덕분에 설립될 수 있었고, 그 곳에 소장된 유물은 그가 수집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가 내 친구라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한다"의 '그'는 동생 다쿠미였다.

1914년 조선에 건너 온 다쿠미는 임업시험장에서 일하며 조선의 공예를 연구했다. 등 그의 글은 조선 백자처럼 담백하다. 명저 에 담긴 것은 번화한 지식이 아니라 '예스럽고 풍아하고, 견고하고 편리한' 조선의 미에 대한 그의 마음이다. 총독부의 무분별한 사방(砂防) 공사에 대한 비판 등, 산의 생명력을 중시한 그의 작업관도 이와 상통한다.

안타깝게도 마흔에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했을 때 슬퍼서 운집한 조선인들, 다투어 상여를 매고 호곡한 조선인의 수만 보아도 그의 생애는 짐작된다. "조선말을 잘하는 일본인, 그보다 더 오래 조선에 산 일본인, 조선의 역사, 조선의 사정에 정통한 일본인은 있겠지만, 그처럼 조선 사람의 마음으로 살다 간 사람을 없었을 것"이라고 야나기는 회고한다. 조선 옷을 입고 조선 음식을 먹으며 살다간 그는 유언대로 조선 식으로 조선의 흙에 묻혔다.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 203363호가 그 곳이다. 광포한 세월 속에 방치된 그의 무덤에 뒷날 형 노리타카는 항아리 모양의 묘표를, 임업시험장의 후신 한국임업연구원의 직원들은 묘비를 세우고 이렇게 새겼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가와이 간지로의 표현대로 '정복자가 피지배자에게 저지른 잘못, 야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그들이야말로 인간의 무지에 빛을 비추어 준 사람들'이다. 야만의 그늘에서도 인간의 빛은 있었다. 더디지만 여기까지 오게 했고 또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일 게다.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사죄' 수위야 어떻든, 그 인간의 빛에 경의를 표하는 게 예의가 아닐까. 한일병탄 100년의 한가위가 코 앞이다. 성묘 길에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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