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힘들어도 죽지만 말라고 했는데…, 죽지 말라고 했는데….”
15일 오후 광주 보훈병원 영안실. 전날 밤 이 병원 주차장에서 제초제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5ㆍ18 민주유공자 지모(53)씨의 빈소를 지키던 큰형(62)은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고문 후유증과 가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5ㆍ18의 고통과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유족들과 5ㆍ18구속부상자회 회원들의 탄식도 터져 나왔다.
1980년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울산에서 화물차를 운전하던 지씨는 휴가를 받아 전남 목포시로 여행을 갔다가 시위대에 가담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해 5월 21일 새벽 여관에서 잠을 자던 지씨는 경찰에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간 뒤 계엄군 등에게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았다. “난 폭도가 아니다”고 항변했지만 되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군홧발 세례였다. 폭도와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쓴 지씨는 이후 광주 31사단헌병대와 상무대로 끌려 다니며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 두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온 지씨는 같은 해 10월 치료를 위해 서울에 있는 동생 집에 갔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5ㆍ18시위 전력이 드러나자 또 다시 고문과 폭행을 당한 뒤 삼청교육대까지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다.
“꿈에 항상 군인이 잡으러 옵니다. 정말 살 수가 없습니다.” 지씨는 한 달 만에 삼청교육대를 나왔지만 그 이후 삶은 악몽 그 자체였다. 정신착란과 화병, 우울증, 불안감, 신경통 등이 항상 그를 괴롭혔다. 86년엔‘오월의 상흔’을 숨기고 결혼을 했지만 부인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3개월 된 아들까지 버린 뒤 집을 나가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다. 핏덩이 아들을 키우겠다며 서울에서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그는 2004년 고향인 여수시로 내려왔지만 고달픈 삶은 계속됐다.
가난과 오월의 악몽을 털어내기 위해 논을 빌려 쌀농사를 짓는 등 발버둥을 쳤지만 현실은 여전히 버거웠다. 고문과 구타 후유증 때문에 하루 일하고 열흘 쉬는 일이 잦아지면서 생활고는 더욱 깊어 갔다.
“이게 아닌데…, 뭘 먹고 살지?” 궁지에 몰린 그는 축산업에 뛰어들었다. 소를 키워서 돈을 벌면 아들에게만큼은 5ㆍ18의 비극과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려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농협과 은행 등에서 대출을 받아 축사를 짓고 소를 매입했지만 경험 부족 등으로 사업에 실패하면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다시 털고 일어서겠다며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지씨는 결국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자 가족들과 5ㆍ18구속부상자회 앞으로 “국립5ㆍ18민주묘지에 묻어달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뒤 목숨을 끊었다.
5ㆍ18구속부상자회 관계자는 “고문 후유증 등으로 인해 자살 시도의 위험에 노출돼 있는 5ㆍ18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사후 관리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며 “지금이라도 5ㆍ18 피해자들에 대한 치료와 함께 지속적인 직업교육, 무상 의료지원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안경호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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